■ 르네상스 교황시기(1441-1521)
르네상스 전성기의 교황들은 공통적으로 일정한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교회사에서는 그들을「르네상스 교황들」로 부르며 집단적으로 취급한다 이 시기는 교황직이「아비뇽의 유폐」와「서구 대이교」란 큰 혼란을 겪은 직후였으므로 교황들이 본연의 영적 임무에 더욱 충실하고 나아가서 새 시대에 대비하여 머리와 지체의 개혁을 실현시키는 것이 교황들이 해야할 가장 급한 일인 동시에 최대의 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리어 르네상스 문화와 인문주의에 감염되어 종교를 속화시키고 교황직을 부패시켰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문화와 학문을 보호하고 촉진함으로써 이 분야에서는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일부 교황들은 터어키인 방어에 적지않게 기여했다.
■ 이슬람교 교황
이슬람은 7세기에는 아랍이、11세기에는 셀주우크족이、14ㆍ15세기에는 터어키가 유럽을 위협했다. 이슬람 터어키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후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유럽으로 진군하면서 헝가리를 격파하고(1526) 비인에 이르러 그것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1529).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자 교황들은 터어키 침략에 대항하고자 회칙을 반포하고 모금을 하고 무어보다도 십자군을 모집하는 등 터어키 방어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모집은 국가들이 그들의 국가 이익만을 내세우고 군사원조를 거부함으로써 무위로 끝났다. 특히 갈리스토 3세와 비오 2세 같은 교황은 죽음과 출정을 각오할 정도로 터어키 방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교황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부분적인 것에 그쳤다. 이후에도 계속된 터어키의 침략은 교황과 스페인의 연합 함대가 레판토에서 터어키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저지되었다 (1571).
■ 르네상스와 교황
니콜라오 5세부터 레오 10세까지 74년간의 10명의 교황을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교황」으로 본다.
니콜라오 5세(1447-1455). 이 교황 때 르네상스가 로마에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유식한 인문주의자였으며 사생활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는 로마시를 미화하고 특히 학문과 예술의 보호로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
갈리스토 3세(1455-1458). 그는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터어키 방어에는 공헌을 했으나 2명의 조카를 추기경에 임명하는 등 족벌주의 치우쳤다.
비오 2세(1458-1464). 그는 인문주의자로 한때 방탕한 생활을 했었으나 개과천선한 후 사제가 되고 교황까지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과거를 비난하면 그는 「에네아는 배척하되 비오는 받아들여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터어키인의 침략으로 인한 위급사태로 실현되지 못했다.
바오로 2세(1464-1471). 그는 처음에 인기가 있었으나 곧 인문주의자와 대립하면서 로마 학술원을 폐지했다. 그래서 예술과 학문의 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식스토 4세(1471-1484). 그는 시스티나 성당의 건립자로 예술사에서 그의 이름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티깐 도서관의 기초를 마련했고 무엇보다도 예술가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로마를 예술의 새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신심도 깊었다. 그러나 그는 족벌주의를 제도화 함으로써 교황청과 추기경단을 속화시켰고 그 결과 인노첸시오 8세、알렉산델6 세 같은 나쁜 교황을 나오게 만들었다.
인노첸시오 8세(1484-1492). 불륜한 생활로 이미 신부가 되기전에 사생아 2명을 두었고、또 아들의 결혼식을 바티깐에서 성대하게 거행했으며 뇌물과 성직매매로 교황청을 부패시킨 악명이 높은 교황이다. 이런 교황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속화된 추기경단에 있었다.
알렉산델 6세(1492-1503). 가장 나쁜 교황이다. 그는 속화된 추기경단으로부터 성직을 매입하는 형식으로 교황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사생아로 4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하나는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나머지는 모두 교황령의 영주로 만드는 등 족벌주의를 일삼았다.
그는 포교상의 분계선을 설정하여 세계포교를 장려함으로써 포교면에서는 다소 공헌을 했다. 또 최근의 연구는 그의 행정을 좋게 평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그의 정치목표와 족벌주의에 종속시켰으며 부도덕한 생활에서 끝내 회개하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행정능력이 높이 평가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의 악명이 변호될 수는 없다.
율리오 2세 (1503-1513). 재위 1년에 그친 비오 3세에 이어 교황이 된 율리오는 위의 식스토 4세 교황의 조카였다. 그는 목자라기 보다는 장군이었다. 그는 교황국가를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계속 전쟁을 일으켰다. 로마를 미화하고 그의 명성을 얻는것、그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는 바티깐을 장식하기 위해 브라만테 (베드로 대성전 설계)、미켈란젤로 (모세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정그림)、라파엘 (바티깐궁 벽화) 등을 초빙하여 빛나는 미를 창조했다. 그와 더불어 르네상스 예술이 절정에 이르렀다.
레오 10세(1513-1521). 그는 우의 악명높은 인노첸시오 8세의 손자뻘이었다. 그는 그의 말대로 교황직을 가지고 즐기려 했다. 그는 선임교황이 소집한 라테란 공의회 (5차)를 이어받아 끝냈다. 그러나 바라마지 않던 개혁이 성취되지 못함으로써 교회의 폐해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후 독일에서 루터가 봉기했다. 레오는 그것을 간단히 「수도자 논쟁」으로 처리하려 했고 그래서 너무 성급한 파문을 내리게 되었다.
요컨대 르네상스 교황들은 예술과 학문 면에서는 크게 공헌했으나 종교면에서는 많은 어둠을 남겼다. 그들은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며 그것을 보호하고 장려함으로써 문예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세를 야만시하고 멸시하는 이교적인 인문주의자들 앞에서 너무 관대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에 심취된 나머지 긴급한 교회개혁을 등한시 했을뿐더러 족벌주의로 교회폐해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폐해로 병든 교회를 외면하고 예술과 학문의 보호를 교황직의 주요 과제로 삼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