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놀라운 일은 그리스도교 역사의 아주 중심이 되는 두 인물의 대축일을 같은 날 거행하고 있는 일이다.
이 두 인물은「이교백성의 사도」라 불리는 바오로와 예수께서 교회를 위한 「바위」라 불렀고 처음부터 사도들중의 중심인물이었던 베드로이다.
교회를 위해 그렇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고유한 축일을 갖고 있는 성인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이 두 인물의 축일을 같은 날 거행하고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일생에 관해 아는 것이 아주 적다. 한 사람의 경우 게네사렛호수에서 일하던 어부 시몬을 예수는 베드로 즉 바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는 열두 사도들중에 첫째였고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수장이었다.
신약성경은 그를 충동적이고 과감성있는 인물、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힘있게 밀어 부치는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는 예수와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음을 불구하고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스승에게서 멀어지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가 예수를 부인했던 사실이나 예수의 고난의 일생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베드로라는 인물의 아주 인간적인 프로필을 보여준 것이고 초인간적인 대주교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바오로는 랍비교육을 받은 바리사이이며 로마시민권을 가졌었고 다수의 서간을 집필하였으며、사도들 행적의 중심인물로서 뚜렷이 드러나 있는 사람이다. 적으로 박해하다가 끝내 그리스도교의 열성적이고 성공적인 전도사로 회개한 바오로는 극단적 회개를 할수 있는 용기와 한번 깨달은 진리를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는、아주 괄목할만한 용기를 가진 인물로 나타났다.
거기다가 바오로는 자기가 세운 공동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때、시간적으로나 서열로 봐서 그리스도교의 첫 신학자였다. 그의 생각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로인해 얻어지는、하느님앞에 선 새로운 인간 존재에 대해서 맴돌고 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의덕분만으로 사람들에게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안에 결정적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오직 신앙안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으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끝까지 선해주어야 하겠다고 느낀 것이다.
이렇게해서 바오로는 외교인들에게 복음의 선포자가 되었고 자기 공동체들을 유태교 율법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는 율법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은 이미 낙후된 것이라 여겼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도 빚진 일없는 하느님의 은총뿐이다.
여기서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난 베드로와 바오로의 논쟁의 가장 깊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오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2、11~21) 에서 말하기를、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머물고 있을때 유태인과 이교도에서 개종한 신자들이 섞여 있는 공동체에서 율법에 충실한 유태인에게는 금지된 음식을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함께 먹다가 나중 유태인들이 두려워서 그만 둔 행위에 대해、자기가 베드로에게 면박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오로는 어떤 개별적인 경우를 넘어서 이 두 인물의 대립성과 관계를 반영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여 준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크고 광범하게 보면서 비록 사도들의 첫째인 베드로의 권위가 있다해도 결코 타협이나、조심스럽게 상황에 적응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신자의 자유에 거스리는 것은 모두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성과 조심을 염두에 둔、꼼꼼한 베드로의 생각을 그는 이해 할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반대 입장을 극단적으로 표명했다.
어떤 상황에서의 현실주의나 전통에 매달리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그대신 구원은 선물로 얻어진다는 생각아래 투쟁적이고 높이 나르는 이상주의를 표방했다.
베드로가 아직도 유태교율법을 따르는데 기울어진 반면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5、1~21) 바오로는 외적 표시에 묶여있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개방된 정신적 모습을 요구했다.
여기서 실제 일어난 사건들 말고도 항상 나타나는 두가지 방향의 대립과 긴장을 보여 준다.
이 그리스도교 사명의 방향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며 서로 떼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가 왜 같은 날 두 사도의 축일을 함께 거행하는지를 알수 있겠다.
서로 상반된 점을 단어로서 표시해 보면 예컨대 자유와 율법、세계로의 개방과 전통 보존、헌신과 능률、높이날음과 현실주의、분야를 넓힘과 보존이라 할수 있다. 물론 이런 개념들에서 어떤 가치판단을 하면 잘못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교 생활과 교리에는 이두 상반된 것이 모두 스며 있다.
이는 근본적 인식차이에서 오는 필요한 긴장감이며、서로 다른 편을 제외하고 홀로 서 있을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일치는 양극의 서로간의 관계안에서 있을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보존과 현실주의에 기인한 그리스도교는 사이비 이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오직 관용、개방과 이상주의만 추구하는 그리스도교는 이 땅의 무게와 전통에 대한 애착을 잃고 단순한 심령주의로 흩어져 버릴 위험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저 안치오키아에서의 갈등의 끝이 교훈적이라 할 수 있다. 바오로는 즉、화해란 말을 쓰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일치를 해치지 않으면서 이런 긴장을 지속하고 있다.
이것은 느슨한 조화가 그리스도교 생활을 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관련을 맺고 있는 양극의 긴장되고 살아있는 움직임이 그리스도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늘 베드로、바오로사도의 대축일을 함께 거행하는 것과 같이 이 두 사도의 긴장감 넘치는 관계와 서로 구별되는 함께함이 가장 살아있는 교회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얼른 보기에도 이상하게 느낄수 있을만큼、되새겨 봐야하는 표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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