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은 영원히 남는다. 역사속에서 또 인간의 마음속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드높히면서 순례자들의 발길을 붙잡는 명작들은 대개 가톨릭교회와 관련이 있다 본보는 중세시대로부터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불후의 명작들을 만나보는「세계성예술순례」를 시작한다. 시간표처럼 짜여진 시대구분이 아닌 시대적 사건안에서, 장소의 이동을 통해 그시대와 만남을 시도하는 이번 기획은 이티리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그 중에서도「꽃의 성모 대성당」을 출발점으로 하고있다. 건축문화 연구소 대표 김영섭씨를 안내자로하는 세계성예술순례는 건축물을 중심으로 그안에 담겨진 예술품들을 함께 다룰 예정이다.
1992년 5월 남산 언저리에 자리잡은 이태리식당 한구석에서 나는 점심 약속에 늦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의 무료함을 때우기 위해 와인리스트를 보여달라고 한다. 브루고뉴、보르도、알사스가 지나가고 이태리 와인 차례를 흩고 지나간다.
문득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Lachremae d’Arno」.
아르노강가의 눈물이라…. 가져온 술병에는 아르노 강가에 걸려있는 폰테베키오의 다리가 그려져 있다.
그 백색 포도주 병을 보며 나는 이미 금은 세공과 보석상이 늘어서있는 폰테베키오에 올라서서 다리 한 가운데 놓여있는 벤베누토 첼리니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공예 거장) 의 흉상을 지나치며 피렌체 시내로 들어서는 내 모습을 그린다.
피런체! 르네상스의 고향.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꽃의 성모 마리아대성당. 나는 어느듯 역사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대성당에서의 암살사건、1478년 피렌체의 지배 가문인 메딧치가의 군주 로렌조와 그의 아우 줄리아노를 미사 시간에 암살하려는 팟치家의 공격으로 로렌조는 성구실로 달아나 무사하였으나 아우는 단검에 19군데나 찔려 사망하고 만다. 사태를 수습하고 형은 27살의 젊은 나로티 대성당에서 죽은 줄리아노를 위하여 당시가문에 봉사하고있던 미켈라젤로 부오나룻터 에게 무덤을 아름답게 장식하고록 명한다. 그리하여 메딧치가문 전용성당 내부에 흉상이 세워지고 그 아래 지키는 밤과 낮의 조각이 미켈란젤로의 젊은 날을 대표하는 불멸의 작품이 되고만다. 이 줄리아노의 두살 (통칭 줄리앙) 은 오늘날에 와서 미술대학에 들어가려는 우리의 가엾은 입시생들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데생의 주제가 되어버렸다.
즉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이처럼 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원래 이 성당 앞에 있는 세례당으로 쓰이는 성 죠반니 성당이 그전에는 대성당 (Cathedral) 이었고 그전에는 다시 현재의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 자리에 있었던 성레파라타 (Santa Reparata) 성당이 주교좌 성당이었다 (1296년 소멸). 이 성당은 현재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초기 프레스코 그림들이 발견되고 있다.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건축은 피렌체 시민들의 발의로 1296년 아프놀포 디 깜비오 (Arnolfo di Cambio 1232~1302’ Lapo라고 불리었다) 에 의하여 기본설계가 이로티졌다.
아르놀포는 1296년 붙 7년동안 즉 그가 죽는날까지 새성당 건립에 분주하였다. 그의 사후 성당건축이 확장됨에 따라 프란체스코 탈렌티 (Frenscesco Tarlenti) 가 정면 설계를 새로 디자인하였는데 그 역시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아 16세기 말에 피렌체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헐어내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꽃의 성모 성당의 아름다운 정면은 19세기에 와서 에밀리오 (Emilio de Fabris) 의 설계로 1887년 Luigi del Mero가 완공한 것인데 건축양식으로 분류한다면 피렌체 스타일의 네오고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렌체의 역사는 선 로마시대 즉 에트루리아의 언덕에 있었던 옛 더스칸 (Tuscan) 문명의 도시 피에졸레 (Fiesole) 가 로마인의 손으로 아르노강가의 평지에 재건되면서부터 시작된다 (로마시대 피렌체는 플로렌티아라고 불리었다). 피에 졸레는 아르노강의 반대편 피렌체 북쪽 언덕에 아직도 그 자리를 잡고 있는 교황 성하의 휴양소도 있는 작은 산정마을이다. 로마시대의 유적 중에 하나인 원형 야외극장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피엔체의 경치야말로 영화「Room with the view」에서의 장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도 꽃의 성모 성당의 두오모 (Duome : 지붕) 가 사이프러스 관목 숲사이로 아름답게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 성당의 돔이야말로 이태리 건축 르네상스의 정화이다. 피렌체의 건축가인 필립보브르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는 아르놀포사후 100년이 넘도록 완성시키지 못한 꽃의 성모성당의 돔을 설계하고 완성시켰는데 이 지붕은 최초의 2중 돔으로 유명하다.
2중 돔 구축법으로 8각 반구형의 응력이 극대화되고 바깥 돔과 안쪽사이에 상부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이게 되었다. 비계와 대들보와 아치를 사용하지 않고 따라서 저렴한 비용으로 완성한 이 지붕의 구축방법은 후에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전의 직경 49m 돔을 구축할 때 그대로 인용한 새로운 방법이었다. 이것은 브르넬레스키의 순전한 독창적 아이디어로 가능하였는데 당시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일을 해내기까지의 교회사목위원회와 후원자인 양모조합위원 (당시 피렌체는 모방직이 성시를 이루었었고 염색에 필요한 명반이 아주 중요한 재원이었다. 약장사출신의 메딧치가가 최초의 상권을 거머쥔 것도 이 명반의 수입과 광산을 선점했기 때문이다) 들과의 논쟁、설득、회유와 갈등이 얼마나 심하였던지 그 모든 기록들이 지오르지오 바자리의 르네상스 미술가전에 상세히 수록될 정도였다. 결국 의심많은 사목위원회는 조각가 로렌조 기베르티도 함께 돔의 축조공사에 관여하도록 결정하였는데 결국 브르넬레스키의 탁월함을 더 돋보이게하는 결과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모든 천재의 생애에서처럼 브르넬레스키는 살아 생전 영과 욕이 점철되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반대를 이겨내고 피렌체의 건축문화를 만 천하에 펼친 그는 1446년4월16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꽃의 성모 대성상 출입문 맞은편의 설교단 밑에 매장되어 오늘도 대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과 만나고 있다.
꽃의 성모성당 옆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종루는 프레스코의 대 화가이자 건축가인 지옷토 (Giotto 1267~1337) 의 작품이다. 당대의 문호인 단테나 보카치오와 절친한 사이였던 지옷토는 1334년 아르놀포에 이어 대성당 신축을 위한 총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같은해 7월9일 대성당 종루 건설에 착수하였다.
최초의 지옷토의 설계를 보면 종루의 꼭대기 부분에 첨탑 형상이나 세모진 피라밋을 붙일 예정이었던것 같다. 그러나 당시 주위에서 이러한 모양이 독일풍 (고딕식을 말함) 이고 옛날 양식이므로 지양해야 한다는 충고를 받았다. 그후 지옷토는 상부부분을 형재와 같이 평평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옷토는 선종후 대성당 왼편 측랑에 브르넬레스키보다 약년 먼저 안치되었다.
대성당 피렌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 중의 하나이다. 정식 명칭은 성 지오반니 (San Giovanni)성당이며 건립년대는 5C경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축양식으로 보면 더스칸 지방의 로마네스크로 분류된다. 역시 아르놀포 디깜비오가 외부를 개수하였는데 지금 보는 8각형 회벽면을 모두 검은 프라토산 대기석띠를 입힌 것도 바로 그였다.
신곡의 저자로 유명한 단테는 바로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 연유로 단테는 항상 이 성당을『나의 사랑스러운 성 지오반니』라고 불렀다. 초기의 돔형지붕은 13세기에 다락을 이은 8각 모임지붕으로 뒤엎여 오늘날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내부 장식은 비잔틴 스타일으 모자익으로 뒤엎여있는데 이것은 13세기에서부터 19세기까지 장구한 세월동안 많은 예술가들에 의하여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르네상스를 전후로 하여 교회미술은 상당한 차이를 그 주제의 표현에서 보이고 있는데 예를 들면 성 지오반니 성당 내진에 모자익으로 장식된 예수 그리스도의 상은 우주의 주재자로서의 성자상으로 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고통 받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상은 교회 쇄신운동 (Antireformation) 이후에 특히 심화되어 격정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세례당에는 문이 세개 있다. 후면의 것은 지옷토의 제자인 안드레아 피사노의 제자인 안드레아 피사노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이것은 처음에 전면 중앙에 있었다가 측문은 후에 옮겨진 것이다. 세례당의 정문과 측문은 로렌조 기베르티가 1401년에 제작한것인데 이것은 당시 직물조합이 1년 동안의 디자인 공모를 통하여 그에게 위임한 것이다.
여기에는 필립보 브르넬레스키와 도네텔로도 참가하였는데 공모전시회가 끝나고 그들은 집행관에게 가서 로렌조의 작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진언 하였다.『질투가 없는 미덕과 함께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판단함으로써 이 일을 자신들이 행하는 것보다 로렌조의 것이 훨씬 찬사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한 그들에 비해 공연히 경쟁자를 시기하고 자신의 악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질투를 폭발시키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이야말로 얼마나 가련한가』라는 지오르지오 바자리의 말은 지금 이 시대에도 반복되고 있다.
문짝에 나타난 로렌조의 청동부조의 주제는 구약성서이다. 첫째 장면인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인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하는 장면이 극세공의 부조기술로 이루어졌다. 나중에 이 작품을 구경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평하기를『참으로 뛰어나고 아름다운 작품이며 천국의 문이라고 하여도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로렌조는 20세때 이 작품에 손댄 이래 40년간이나 이 작품을 갈고 닦았다.
일화에 의하면 꽃의 성모대성당의 돔을 축조하고 있던 필립보 브르넬레스키마저도 나중에 작품에 광을 내는 로렌조를 도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그 청동 금박문짝에 브르넬레스키의 의리있는 어진 손길도 함께한 것이다.
로렌조는 자신의 대머리두상을 문 한가운데 양쪽에 그의 아버지의 두상과 함께 새겨넣었기 때문에 세례당 문앞에서 우리는 그의 얼굴과 만날수 있다. 물론 젊은쪽이 로렌조다. 브르넬레스키의 흉상은 대성당의 출입문 오른쪽에서 그의 제자、안드레아의 솜씨로 놓여있다. 최초의 건축가、아르놀포디 깜비오의 얼굴은 지옷토가 그린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프란치스꼬 성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수사들의 장면에서 보인다고 하는데 첫 머리에 서로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중의 하나라고 한다. 과연 누가 아르놀포의 얼굴일까?
상념 속에서 르네상스의 빗장이 활짝 열리고 나는 다시 시간의 여행을 떠난다. 옷깃을 여미고 천재들의 무덤인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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