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은 우리나라의 큰 수난이었고, 천주교 신자들에게 찾아온 또 다른 박해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신앙을 탄압하는 공산정권 속에서도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목소리를 높이다 순교한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 순교자 중에는 교구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신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핀 이가 있다. 바로 심응영(데시데라토) 신부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우리나라에 파견된 심 신부의 프랑스 이름은 폴리 장 마리 데지레 장 바티스트(Polly, Jean Marie Désiré Jean Baptiste)다. 우리가 심 신부를 부를 때 칭하는 심응영(沈應榮)은 그의 한국 이름이다.
1884년 10월 27일 프랑스 베르녹에서 태어나 1906년 차부제품을 받은 그는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아, 1907년 8월 8일 우리나라에 입국했다. 심 신부는 충남 서산의 서산동문동본당, 강원도 원주 원동주교좌본당, 대전 목동본당 주임을 역임하다 1931년 5월 수원 북수동본당 4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북수동본당은 수원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본당이었지만, 교세는 미미했다. 본당이 있던 수원 화성(華城) 인근 지역에서는 박해시대부터 “무당짓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학쟁이만은 되지 말라”는 말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천주교에 배타적이었고, 무속신앙이 횡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역에서 신식교육을 받고 지역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예배당을 다녔을 정도로 개신교 교세가 강했다.
심 신부는 이런 수원 지역에 천주교 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심 신부가 부임할 당시 70여 명에 불과했던 본당 신자 수는, 심 신부가 재임한 18년 사이에 2000여 명으로 늘었다. 심 신부는 프랑스의 원조와 자신의 사재를 동원해 연와조 고딕식 성당을 건축하고, 소화강습회(지금의 소화초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심 신부를 기억하는 신자들은 그가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신자들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게으른 모습을 보이면 가차없이 야단치고 심하면 매를 들기도 했다. 신자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잘못을 했을 때에도 불같이 꾸짖곤 했다.
심 신부는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용이 금지됐을 땐 “모든 책임은 내가 질테니 (한글)교리책을 그대로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어느 날 일본인 순사가 사제관으로 달려와 책임을 추궁하자 심 신부는 “세상에 어느 못난 국민이, 말은 자기 민족 말을 하면서 글은 남의 나라 글을 쓰느냐”고 따졌다. 이 일로 경찰서로 호출되자 “내가 배워보니 조선어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매우 훌륭한 글”이라면서 도리어 “조선어를 나쁘다고 한 형사를 파면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늘 엄격한 모습의 심 신부였지만, 어린이에게만은 한없이 자상했다. 지역 어린이들은 자주 성당 사제관에 모여 놀고 떠들고, 때로는 창문을 깨기도 했다. 하지만 심 신부는 이를 보면서도 모르는 체 할 때가 많았다. 한 신자가 “아이들이 저렇게 소란을 피우는데 어떻게 견디냐”고 묻자 심 신부는 “내버려두라”면서 “그게 아이들이야. 천진성을 잃으면 이미 아이들이 아니지”라고 대꾸했다.
심 신부는 간혹 잘못한 어린이에게 체벌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어린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과자를 나눠주며 다가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1934년 소화강습회를 열었다. 성당도 아직 채 짓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강습회를 먼저 설립한 것이다.
심 신부는 일제 치하에서 국민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교육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한글과 교리를 가르치는 강습회를 열었고, 이곳이 1945년 소화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심 신부가 정한 ‘애주애인(愛主愛人)’,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교훈은 아직도 소화초등학교의 교육을 통해 이어 내려오고 있다.
수원지역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한 심 신부는 1948년 8월 사제인사를 통해 천안본당 주임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신자들은 심 신부에게 피난을 권했지만, 심 신부는 “천안에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는 한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성당을 지키다, 1950년 8월 23일 공산군에 체포돼 9월 23~26일 경 피살됐다.
심 신부의 시신을 찾지 못해 묘지조차 없지만, 심 신부의 정신은 여전히 수원지역에 남아있다. 수원대리구 북수동본당은 심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전 소화초등학교 건물을 ‘뽈리(Polly) 화랑’으로 삼고 심 신부와 관련된 유물과 사진을 상설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