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클리파와 후스이단
아비농의 굴욕에 이어 교회가 2명의 교황으로 분열되어 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영국과 보헤미아 (체코슬도바키아) 에서 이단이 발생했다.
영국의 이단은 위클리프에 의해 후에 프로테스탄트가 주장하게 될 교리가 이미 거의 다 중장되었다는 점에서、또한 보헤미아에서는 국민들이 후스의 그릇된 주장에 크게 동조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두 이단은 당시 상승 일로에 있던 국가교회주의를 더욱 부추겨 그렇지 않아도 이미 크게 악화되어 있던 교황권을 더욱 궁지에 몰리게 했다.
요한 위클리프(약 1320경~1384)는 주임신부로 재직하면서 옥스포드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인기가 있었고 왕궁과 의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가 설교와 저술을 통해 부자교회를 공격하며 오류를 전하기 시작한 것은 1376년 무렵부터였다. 그는 후의 프로테스탄티즘처럼 미사와 성체의 성변화와 고해 등 대부분의 성사를 부인했고 또한 사제의 독신제、성인공경、대사、수도서원 등을 배척했으며 무엇보다도 성서만을 신앙의 최고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과 주교 등 교계제도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는 단죄를 받지 않은채 사망했다. 물론 그는 생전에 런던의 교회회의에서 두번 단죄되기는 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파문된 것은 그의 사후 콘스타츠 공의회에서였다. 그런데 그의 이단은 당시 영국과 보헤미아사이에 접촉이 많았던 관계로 곧 보헤미아로 전파되어 후스 이단을 낳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한 후스(1369경~1415)는 보헤미아에서 태어나 사제가 된후 엄격한 도덕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위클리프만큼 독창성은 없었으나 열광적이고 웅변적인 설교로 대중을 감동시키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이단을 설교하기 시작한 것은 프라그 대학의 총장이 된 1402년경부터였다. 그의 교리는 성체의 성변화를 인정한 것외에는 위클리프의 주장 그대로였다. 당시 보헤미아에는 고위성직자들이었다. 그래서 후스는 독일인에 대한 증오심을 이용하여 반독일 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곧 민족운동으로 확대되어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후스의 이단은 1411년부터 문제시 되어 잇달아 교황으로부터 두번 단죄되었고 1414년에는 독일왕의 명령으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자신을 번명해야 했다. 그러나 후스는 그의 오류의 철회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래서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체코인들이 격분하여 독일왕과 교황을 거스려 일어났다. 난폭해진 후스 파들을 진압하기 위해 여러번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대후스파 보헤미아 전쟁). 그러나15년간의 전쟁 (1419-1436) 은 국토만 황폐화시켰을 뿐 아무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났다. 그후 후스파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고 온건파는 한때 교회와 화해했으나 잠시에 그쳤다.
■ 국가주의ㆍ국가교회주의
위클리프와 후스는 국가주의에 호소함으로써 지지자를 얻을수 있었다. 나아가서 후스는 반독일 운동을 반교황 운동으로 확대시킬 수 있었으며 위클리프의 국민적 이단은 그후 헨리 8세의 국가교회를 개척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교회주의는 콘스탄츠공의회에서 더욱 거세졌고 그 결과 교황 선거가 처음으로 국가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종전처럼 추기경들만이 아니고5개국 (영ㆍ 불ㆍ독ㆍ 이태리와 스페인) 대표들이 함께 교황을 선거했다. 이어 새로 선출된 교황 마르티노5 세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각국 대표와 개별적인 정교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양보는 국가교회주의를 더욱 조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교회주의는 당시 국가주의가 제일 고조되어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심했고 다음이 독일이었다. 반면 이태리와 스페인은 교황에게 충실하게 머물렀다. 종교개혁이 이들 나라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영국교회는 어느 나라 보다도 로마의 구속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보니파시오 8세때 교황이 영국교회의 재산문제에 개입하자 격렬한 반항을 보였다. 다음 14세기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재정사정이 어렵게되자 교황청의 재정간섭에 더욱 거세게 반항했다. 동시에 민족의식이 고조됨에 따라 교황청과의 봉건적 종속관계까지 무효화시켰다. 이어 콘스탄츠의 정교조약에서는 성직자 임명에 있어서 왕권의 개입을 강화시켰다. 이때 성직자 임명에 대한 교황의 승인이 형식적이 되었는데 그것마저도 등한시 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로마 교황청에 대해 프랑스 지역교회의 자치권을 요구하고 주교들을 교황의 간섭에서 방어하려는 이른바「갈리아주의」가 일로 상승하는 국가주의에 힘입어 고조되었고 이어 필립 4세 (미황) 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싸움에서、그리고 백년전쟁 이후 어려워진 프랑스 교회의 재정 사정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어 교황청과의 충돌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츠 공의회 때나 그후의 정교조약에서도 본질적인 해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1438년 왕과 성직자들이 함께 이른바「부르쥬 정교칙령」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은 주교를 왕이 직접 임명하는 등 프랑스 교회를 왕권에 종속시키는 갈리아 주의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후 주교의 임명에 있어서 교황의 승인이 다시 합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칙령은 프랑스 혁명까지 실제로 프랑스 교회의 헌장 구실을 하면서 지속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에 이어 독일에서도 군주가 교회의 주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제권의 약화로 오히려 수많은 지역에서 그곳의 제후들이 교회를 좌우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 지역해서 그곳의 제후들이 교회를 좌우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 지역에서 마치 교황처럼 행세했다. 그들은 1338년 렌제 모임에서 향후 그들이 선출한 왕에 대해 교황의 승인이 불필요함을 결의하고 선언했다. 황제 제도의 실패는 교회를 점점 제후들의 주권에 종속시키게 했다.
결국 위클리프의 이단은 루터가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점에서、국가교회 주의는 특히 독일에서 제후들의 권력을 강화시켜 종교개혁을 주도하게 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의 주요 선구자가 되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