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향집을 말하자면, 좌측으로는 20m거리에 공동묘지가 있었으며, 그 공동묘지를 돌아 1km쯤 가면 「영락원」이라는 음성 나환자촌이 있습니다. 나환자촌 옆에 보통 사람 마을이 있었으며, 우측으로는 고개 너머로 2km 떨어진 곳에 동리(교우촌)가 있습니다. 우리 집은 고개와 산중턱 사이에 있었고 한 길이 나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습니다. 우체부는 아침에 우편 자전거를 타고 고개 위에서부터 내리막길을 기분 좋게 치달리다 보니 항상 집 앞을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저녁때에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와야 하므로 우리 집에서 땀을 닦으면서 쉬게 되는데 그제서야 우리집 우편물을 내 줍니다. 그러다 보니 우편물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소신학교 입학원서도 접수마감 전날 저녁때에야 간신히 받았습니다. 집 앞으로는 커다란 냇물이 흐르고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웃집이 없다 보니 여러 가지 가축을 키울 수도 있어서 토끼, 오리, 닭, 등을 방목했습니다. 오리란 놈은 아침에 문을 열어 주면 냇가로 나가서 하루 종일 헤엄치고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그리고는 물속에 알을 낳기 때문에 항상 오리알을 주으러 냇물 속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동리 아이들이다 주워 가기 때문입니다.
밭을 일구어서 여러 종류의 곡식을 심기도 하였습니다. 앞엔 냇물이요, 뒤로는 산이며, 옆으로는 밭이 있고 공동묘지, 나환자촌이 어우러진 환경이었죠. 어떤 때는 고개서낭당에 고사떡이 있는데 모두 내 차지입니다. 집으로 가져다 구워 먹기도 하였습니다. 나환자촌에서 나오는 계곡에는 미꾸라지가 얼마나 많은지 팔뚝만한 것을 손으로 건져야 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접근을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밤에는 등잔불 켜놓고 식구들이 다함께 만과 (저녁기도)를 바쳤었는데 만송으로 주로 성모님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도 「무변 해상」이나「마리아 모후여」를 제일 좋아합니다. 가사가 바뀌어서 서운하지만 미구에 닥칠 내 장례미사 때 불러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고교입시를 대전에 있는「ㅈ」공고에 부설된 철도 고등학교에 응시했습니다. 물론 합격은 되었지만 형님이 고3인지라 형편상 내년에 진학하면 어떻겠느냐는 아버님의 말씀을 따라 진학을 일년 미루다가 신학교로 바꾸었습니다. 전원생활을 하는 동안 키는 무려 15센티나 자랐습니다. 지금은 저수지가 되어 물에 잠기는 바람에 아랫마을 교우촌으로 이사를 했고, 그래서 본적지를 찾아가려면 잠수복에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야 하는 영원히 가보지 못할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별로 가진 것 없이 살았어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로 생각됩니다. 역시 행복의 조건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요, 정신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중 진복팔단에 관한 내용입니다. 진정한 행복에의 길을 설교하신 것입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떤 시인은 『저 건너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 갔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왔노라』고 읊었습니다. 동양의 행복관은 무엇일까요? 오복사상(五福思想)입니다. 오복이란 「수, 부, 귀, 강녕, 다남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복이더냐 하는 회의를 품게 됩니다. 「수」는 오래 사는 것인데 그러나 오래 살아서 망녕피우고 대소변을 받아내게 하는 것이 과연 복일까요? 부담스럽고 귀찮은 존재일 따름입니다. 「귀」는 권력과 명예를 뜻합니다. 그러나 화근이 되기도 합니다. 고 박정희씨는 이를 종신토록 탐내다가 결국 불행한 종말을 고했습니다. 하필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측근으로부터 죽음을 당했습니다. 「강녕」은 건강인데 그야 시름시름 앓아 누워있는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혐오식품으로라도 건강을 지키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러나 건강하다 해서, 힘이 있다 해서 주먹으로 사고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장교로 군복무 할 때 어떤 젊은 장교가 힘이 넘쳐서 그랬는지 아내를 두들겨 패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여자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 건강은 오히려 불평입니다. 「부」라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로되 너무 탐내다가는 오히려 불행이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돈 많이 벌어서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돈 많이 벌어서…』 돈 많이 벌려면 나쁜 짓을 해야 합니다. 『떵떵거리고 살려면…』남을 눌러야 합니다. 그러면 눌린 사람은 가만히 있겠습니까?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것입니다. 그러면 누르는 자는 더 세게 눌러야 합니다. 이는 피차 불행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이런 사고방식을 뜯어 고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남자」인데 이조시대에 여자가 시댁에서 쫓겨나는 이유인 칠거지악 중에 가문을 이어갈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무자거)도 있습니다. 이 형편없는 도덕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눈물을 흘렸던가요? 남편이 씨받이 여인과 잠자리를 들 때 밖에서 정한수 떠놓고 강요된 득남축원을 드려야 했던 불쌍한 여인들! 여기서 여자의 가슴앓이가 생겼다 합니다. 행복이 아니라 잔인한 인권유린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행복관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차원을 가르칩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의 진복팔단(마태오 5, 1∼12)입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나온 대로 열거해보면 ①청빈의 정신을 가진 이는 복되다. 그들은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 ②온순한 이는 복되다. 그들은 땅을 유산으로 받으리라. ③우는 이는 복되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라. ④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는 복되다. 그들은 배부르리라. ⑤자비를 베푸는 이는 복되다. 그들은 자비를 받으리라. ⑥마음이 깨끗한 이는 복되다. 그들은 천주를 뵈오리라. ⑦평화를 이룩하는 이는 복되다. 그들은 천주의 아들이라 불리리라, ⑧정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이는 복되다. 그들은 천국을 차지하리라 등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은 행복을 물질적, 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서 찾아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또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 때」 행복이 온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모든 이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랬기 때문에 불의와 부정, 폭력과 인권유린이 난무했던 작금의 불행한 사태를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우악스럽게 표현하면 떼어먹고, 등쳐먹고, 잡아가두고, 패고, 공갈치고, 빼앗고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봐야 점점 더 불행해질 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 말씀대로 남을 위해 살 때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 행복은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채워질 것』(루까 6, 38)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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