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 이전의 상태
교회의 머리와 지체의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는 날로 높아만 갔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 교회의 폐해도 그대로 남아 결국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누가「당시 교회의 폐해가 심각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날수 밖에 없었다」고 종교개혁의 원인을 공식화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흑백이론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원인은 대단히 복합적이어서 그렇게 간단히 설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시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상황만 하더라고 간과될수 없는 이유들이다.
문제의 교회의 폐해만 하더라도 물론 개혁이 절실했을만큼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과장이 없지 않다. 그리고 폐해 자체도 교회를 떠나 종교혁명을 일으켜야할 정도로 전반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뿐만아니라 교회 일부에서는 이미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신자 대중의 신심에도 긍정적이고 밝은 면이 적지 않았다.
일반 신자 대중은 아직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생활은 출생에서 사망까지 완전히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으로 지배되고 있었다. 도시에는 으레 성당과 수도원이 있고 또 거대한 고딕성당과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이 많았다. 또한 양로원과 병원 등의 자선시설도 크게 증가되었다.
또한 성인 설교가들이 많이 나타나 속죄와 회개를 외쳤다. 그들의 설교는 마침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여서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했다. 특히 스페인의 도미니코회원인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유럽의 구석구석을 순회하며 더없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시에 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그의 제자인 요한 성 베르나르디노, 그의 제자인 요한 카피스트라노 등도 설교가로 활약했다.
한편 14세기에 크게 번영한 신비주의는 교회에 새로운 신심과 영성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독일은 이 시기에 에크하르트를 위시해서 그의 제자인 타울러와 수소 (원명은 조이제)등 3명의 위대한 신비가를 배출했다. 내적 정신을 강조한 이 신비사상은 15세기 네델란드의「공주 수도회」에서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되어 소위「근대적 신심」을 낳게 했다. 전례와 성사 보다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면을 강조한 이 새로운 신심은 영신주의에 치우칠 위험이 없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영성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이러한 영성의 작품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우리에게도 친숙한「준주성범」이었다. 이 신심서는 오랫동안 토마스 아켐피스의 저술로 여겨져 왔으나 사실인즉 그는 그것을 아름다운 라틴어로 옮긴데 지나지않고 진짜 저자는 위의 신심 그룹의 창립자인 그로테였다.
이와같이 중세말기의 종교생활에는 긍정적인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정적인 면이 더 크고 많았다.
■ 뿌리깊은 구조적 폐해
중세 말기는 불안과 공포의 시기였다. 백년 동안에 다섯 차례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면서 무려 2천5백만의 희생자를 냈다. 게다가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면서 도시들을 황폐화시키고 도시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재난은 영신생활을 전염시켜 괴상한 옷을 입고 자기 몸을 채찍질 하며 이상한 소리로 기도를 하는 등 아주 건전치 못한 신심을 낳게 했다.
나아가서 종교생활이 전반적으로 질서와 균형을 잃고 외면적이고 피상적인 신심, 성인 축일의 과잉, 구복적인 성인공경, 지옥과 마귀에 대한 지나친 공포, 마녀 신앙, 그 밖에도 신심과 혼합된 많은 미신 등, 매우 위험하게 발전했다. 또한 과열된 순례, 특히 지나친 유해 공경은 유해 수집을 부채질하여 제후들까지 유해를 수집하여 장사를 하게 했다.
대사와 전대사의 남용은 종교개혁의 봉화 구실을 하게될 만큼 가장 큰 악폐의 하나였다. 전대사가 십자군과 성년등을 계기로 너무 많아지고 또 그것을 얻는 조건도 기도와 애긍 등 많이 이완되었으며 마침내 전대사가 연옥 영혼에도 적용될 수 있게 되자「돈이면 연옥 영혼도 구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교가들이 대사의 본뜻을 왜곡시켰고 마침내는 대사 거래까지 생기게 되었다.
특히 성직자 세계에서는 성직록을 둘러싼 겸직과 성직매매식의 거래, 르네상스 교황들의 지나친 족벌주의, 파문과 성무정지의 남용등의 폐해가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폐해들이 개인적인 배신행위 보다는 교회의 뿌리깊은 악순환적 제도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데에 더욱 문제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황직과 주교직이었다.
교황직은 악순환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나쁜 추기경들이 나쁜 교황을 선출하고 다시 나쁜 교황이 나쁜 추기경들을 임명했기 때문이다.
주교직은 봉건제도의 구속에서, 다시 말해서 귀족들의 독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주교들은 거의 예외없이 귀족들이었고 또 종종 주교품도 받지 않은 속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을 선출한 참사회에 매여 있어야 했고 정치적으로는 제후의 압력을 받아야 했으며 또 선제후인 주교들은 그들의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전쟁까지 일으켰다.
고위 성직자 즉 주교좌 성당 참사회원들은 신학도 모르고 미사도 안지내고「하느님의 귀공자」로 불리면서 오로지 생활만 즐겼다. 그들은 성직록을 겸임하고 있었던 관계로 돈이 많았다. 한편 교회들은 부유했으므로 귀족들의 수용소 구실까지 해야 했다.
하급 성직자들은 고급 성직자들과는 정 반대로 말할 수 없이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야말로 성직자의 프롤레타리아였다. 근본 원인은 성직자 수가 너무 많은데 (일례로 쾰른 성당에는 그 수가 1백45명이나 되었다)있었다. 또 그들은 교육도 못받고 무식했다.
수도원도 일반적으로 규칙이 이완되고 타락해 있었다. 그 주요 원인은 수도원이 너무 부유해진데 있었다. 수도원장은 종종 속인으로 수도원 밖에서 살았고 수도자 중에는 성소 없이 입회한 사람이 많았고 도망친 수도자도 많았다.
종교적인 폐해 중에서 교황청의 과도한 재정적 요구는 자연 교황청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초래했다. 로마에 대한 이러한 불만이 가장 컸던 곳이 독일이었다. 그 불만은 마침내 루터의 종교개혁을 승리로 이끄는데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최석우
세계교회사는 필자 최석우 신부님의 사정으로 중세까지 연재를 끝내고 근세 및 현대교회사는 차후 속개됩니다. 지금까지 집필해주신 최석우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