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6일은 베트남 체재기간 중 가장 특별한 날이 되었다. 민소녀가 한국의 김효주 아녜스 성녀의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민소녀는 베트남에서 한국의 성인을 세례명으로 탄생한 첫번째 사람이 된 셈이다.
민소녀는 이른바「미감아」라 일컫는 베트남 나환우의 자녀다. 어감상 또는 실제적으로 적합치 않는 말이라 사장(死葬)이 되다시피한 표현, 미감아는 우리의 기억속에서도 선명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나의 아이를 미감아 자녀들과 함께 공부 시킬 수 없다』는 학부모들의 서슬퍼런 항의로 서글픈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역사가 멀지않은 우리의 과거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의 독자들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치도 않은 차별을 뒤로하고 우리의 나환우 자녀들 중 몇명은 새로운 부모를 찾아 낯선 이국땅으로 떠나야했고 부모와 자식간의 어처구니 없는 이별현장, 그 애잔한 아픔의 현장을 당시 나는 취재라는 이름으로 지켜보아야 했었다.
그래서 이들 베트남의 미감아 아니 나환우의 자녀들은 더 더욱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구나 아이들은 너무나 예뻤고 천진스러웠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천사같은 얼굴로 삶에 찌든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지도 모른다. 그 작은 천사중의 하나가 바로 민소녀였다. 초롱초롱한 큰 눈, 까무잡잡한 피부, 깡마른 체구의 민소녀는 방년 8살. 전형적인 베트남의 아가씨(?)였다.
호치민시에서 약20분 거리에 있는 나환우 정착촌「잔 빈」(Zhanh Binh)마을의 조그만 성당에서 김효주 아녜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민소녀는 명실공히 한국교회와 베트남교회를 연결하는 작은 고리의 상징처럼 보였다. 한국의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선택하게한 이 놀라운 센스는 바로 닷신부의 아이디어였다.
우리가「베트남의 다미안」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싶었던 닷신부, 그는「잔빈」마을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이 없었다. 베트남 체재기간중 거의 우리와 함께했던 닷신부는 예수회 소속. 잔빈마을의 나환우들은 물론 그 자녀들과 닷신부는 마치 허물없는 친구사이 같았다.
그들은 함께 뛰고 함께 노래하고 철부지처럼 함께 웃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닷신부, 그의 표정속에는 나환우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그대로 배어있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감동시켰다.
그의 희망은 아니 간절한 소망은 나환우 자녀들의 교육이었다. 나환우 자녀들의 대학교육을 꿈꾸는 그의 소망은 베트남 전체의 상황속에서 볼 때 다소 벅찬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환우 정착촌인「잔빈」마을과 국립나병원에 해당하는「벤산」(Ben San)을 방문해 보면 그의 소망이 결코 무리가 아님을 감지할수가 있다. 그것은 사람이 산다는 말이 결코 적당치가 않은 곳이었다. 그것은「삶이 아니라 생존」그 자체였다.
우리 일행으로 함께 동행한 성라자로마을 정착촌의 나환우 3명은『20년전 우리의 생활도 이렇지는 않았다』며 눈물을 쏟았다. 아닌게 아니라 베트남 나환우들과 우리 나환우들과의 상봉장면은 눈물없인 볼수없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일그러진 손과 손을 마주 비비며 만남의 정, 아니 동병상린의 정을 나누는 장면은 마치 비극영화의 한장면을 방불케 했다. 내가 시인이, 소설가가 아닌 것이 그때처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잔빈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벤산 나병원에서 우리는 베트남의 현실, 그 한 조각을 목격해야 했다. 유난히 많다고 느껴지는 중환자들은 오랜 내전으로 시달리면서 뒷전에 밀려 날 수 밖에 없었던 나환우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듯 했다.
장유 노인. 올해72세라는 이노인은 양손과 두발이 모두 사라진 대표적인 중환자였다. 30년간 베산병원에서 살고있다는 장유노인은 두손과 두발이 모두 없다는 중대한 현실을 잊고 사는듯 했다. 체념이라기 보다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는듯 한 이 엄숙한 삶의 자세는 훌륭한 묵상거리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미처 이름을 묻지도 못한 여자 나환우 역시 두손 두발이 모두 없어진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모처럼 만난 손님에게 자신이 만든 조각보자기를 구경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자리아래에서 낡고 무뎌보이는 칼을 꺼내 실습으로 우리의 의심을 불식시켜 주었다.
날랜 몸놀림으로 입과 몽당 손을 이용, 그녀는 조각보자기를 만드는 요령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녀의 팔목에 칼을 대고 헝겊조각으로 동여매었다. 몽당손에 묶이 이 칼은 헝겊을 자르고 마름질하는 유일한 도구로 사용됐다. 몽당손에 매달린 칼과 입, 그리고 무릎에 의해 거짓말처럼 바느질도 이루어졌다』「놀라는 우리」와「행복해 하는 그녀」.
그녀는 자신의 숨은 솜씨를 모처럼 찾은 외국손님과 한국의 나환우 동료들에게 보여줄수 있는 시간을 무척이나 소중해 했다. 지켜보던 우리 나환우 한명이 갑자기 문을 뛰쳐나갔다. 따라서 보지 않아도 그의 다음 동작은 뻔했다. 마음 놓고 울기위해서 그는 뛰쳐나갔지만 우린 그 자리에서 울수 밖에 없었다. 나는 사진찍는 일조차 잊었다.
그 모습은 바로 그녀가 한 인간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듯했다. 차마 보기가 민망한 이작업으로 탕생한 조각보자기는 누더기를 방불케 했지만 작업에 몰두하는 그녀는 인간생명의 고귀함을 다시한번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덤으로 얻은 선물」이었다.
호치민시에서 약70㎞떨어진 곳에 위치한 벤산 나병원은 근교의 나환자 정착촌 4개를 묶어 관장하고 있는 베트남 유수의 나병원이라고 했다. 3백명 가량의 나환우 가족들을 포함, 모두 1천2백84명의 나환우가 이 4개의 마을에 산재해 있으며 벤산병원에는 모두 5백39명의 나환우가 있다고 했다.
벤산 나병원, 잔빈 마을과의 상봉은 이번 베트남 방문에 있어 공식일정의 하일라이트였다. 성라자로마을 원장 이경재신부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베트남으로의 행보는 이신부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실시해온 자선음악회「그대 있음에」의 올해공연 수익금중 일부를 베트남 나환우들과 나누기로 결심한데 기인하고 있다. 성라자로마을 정착촌 나환우들이 이 결심에 그들의 사랑과 정성을 보탯고 3명은 그들의 동료, 이웃을 직접 보고자 했다.
라자로돕기회 운영위원인 한성희여사, 김혜덕사장(원 제과)그리고 취재기자가 동행한 이번 베트남 방문은 어느면으로 보나 완벽(?)했다. 베트남의 현실에서 볼 때, 나환우들의 삶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이신부와 그의 제의에 동참한 사람들의 사랑의 선물, 현금지원은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분명했다. 그들은 돼지사육을 원했고 벤산병원과 잔빈마을은 돼지사육의 원대한 뜻을 우리에게 펼쳐보였다.
베트남의 나환우들을 삶이란 테두리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돼지사육과 더불어 2세교육이 필요하다는 닷신부. 그의 소망은 이곳 나환우들과의 만남을 통해 걸림돌없이 우리에게 전달됐다. 나환우 자녀들의 대학ㆍ기술교육은 곧 나환우들의 신분 상승을 의미하고 있음을 닷신부는 우리에게 전하려 애를 썼지만 그건 헛수고 였다. 우린 이미 왜 나환우 자녀들이 대학을 가고 기술을 배워야 하는지를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얼마전까지 우리 나환우들의 자화상이었고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베트남의 나환우까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또는 그녀에게 베트남을 가보라고 권하곤 한다. 베트남의 나환우를 만나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곳엔 왜, 우리가 우리의 작은 정성이나마 그들과 나누어 살아야 정성이나마 그들과 나누어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정답이 기다리고 있다. 아울러 우리의 나눔은 먼저 나눔을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할 의무라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닷신부는 우리의 그같은 의무를 일깨워준 사람이었다. 나환우와 그 자녀들과, 그가 하나로 어우러진 삶의 현장은 그 자체로서 우리의 의무를 의무를 일깨워주는 징표가 되었다. 아울러 우리는『사랑은 반드시 나누어야 한다』는 진리를 효주아녜스로 거듭난 베트남 민소녀의 눈에서 분명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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