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7월 어느날 피렌체 시내를 관통하는 아르노(ARNO)강가에 면한 호텔, PLAZA ZUCHERI 2층 창가로 다가간다. 바닥까지 열어젖힌 창 앞에는 며칠째 내린 비로 불어난 탁류가 노도와 같이 년실대는 광경이 펼쳐지고 내게 그것은 두려움과 상실의 아픈 기억을 되살린다.
1966년 11월 4일 피렌체 시를 덮친 아르노 강의 대홍수는 인류에게 남겨진 르네상스 미술의 유산을 파괴시키고 우리로부터 많은 것을 사라지게하고 말았는데 그 날의 악몽을 대표로 상징하는 십자가가 있다.
바로 산타크로체 성당에 있는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지오반니 치마부에(1240년경~1302년)의 작품이다 (십자형 나무판위에 템페라 그림). 치마부에는 프레스코화법의 대화가 지웃토의 스승으로 지오르지오 바사리의 르네상스 미술가전 첫 머리에 등장하는 르네상스 여명기의 중요한 화가이다.
바사리는 치마부에를 소개하는 글의 첫머리에 『끊임없는 재앙의 홍수로 인하여 예술의 씨가 말라버리려할 때 하느님의 섭리로 예술재건에 첫걸음을 내디뎌야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거 썼는데 그의 대표작이 700여년이 지난후에 다시 대 홍수로 인한 문화유산 피해의 상징이 되고 만것이다.
치마부에의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가 제대 중앙에 걸려 있었던 성 십자 성당 산타크로체는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성당인데 프란치스꼬회와 거의 동사에 설립된 도미니꼬회의 산타미리아 노벨라 성당이나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의 산토 스피리토 교회와 같이 13세기 전반에 이탈리아 수도회 창립 붐을 타고 생겨난 교회 중의 하나로서 아르노강가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다. 1228년 작은 교회로 출발한 성십자성당은 얼마안가서 꽃의 성모성당 설계자인 아르놀포 디 깜비오에 의하여 1294년 재건립의 전기를 맞아 1385년 준공되었다. 외부의 아름다운 대리석은 꽃의 성모 대성당에서와 마찬가지로 19C에 와서 붙인 것이다.
피렌체에서 두번째로 큰 교회인 성십자성당의 별명은 「피렌체의 판테온」인데 이것은 로마의 판테온 신전이 609년 동로마 황제로부터 교황 보니파시우스 4세에게 양도된 이후 성모와 모든 순교자를 위한 교회로 봉헌되었고 그후 판테온에는 화가 라파엘로와 건축가 발닷사레 페루치, 통일 이탈리아의 국왕 빗토리오 엠마누엘 2세 등 천재와 명사의 무덤이 원형 벽 한 부분들을 차지하게 된 것에 기인한다.
성십자성당은 한마디로 「천재의 무덤」이기도 하다.토스카나가 낳았고 피렌체가 기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여기에 누워있다.성당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맨 첫번째 보이는 무덤이 바로 그의 제자 지오르지오 비자리의 손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초상아레 세 여인이 슬퍼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것은 각각 회화의 연인. 조각의 여인, 건축의 여인들인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무덤을 마주보고 있는 것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한 길릴레오 갈릴레이의 무덤이다. 그옆에는 지오반니 성당의 문「천국의 문」을 제작한 로렌조 기베르티와 그의 아들이 잠들어 있다.
다시 미켈란젤로 쪽으로 눈을 돌리면 그 옆에 단 테의 기념비가 있고 이어서 극작가 빗토리오 알페에리와 군주론을 쓴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묘가 계속된다. 그 옆에 도나텔로의 수태고지 모습을 그린 금박입힌 대리석 부조가 보인다. 무덤은 아니지만 단테 기념비와 같이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유명한 작곡가 죠아키노 롯시니와 아메리카를 빌견한 아메리고베스풋치의 부조 흉상이 새겨져 있는 신대륙 발견의 기념비도 있다.
모두 피렌체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하였던 사람들이다. 성십자성당 내진에 위치한 2개의 부속 소성당에는 지웃토의 저 유명한 프레스코 그림 「성프린치꼬의 일생과 세례자 요한,복음사가 요한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이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성십 성당내진까지 가서 지웃토의 그림을 보고나서 성당 소매체에 따로 붙어있는 저 유명한 필립보 브르넬레스키의 명작 팟치 소성당을 보지않고 나오면 맛있는 생선머리를 먹지않은 것과 같다.
메딧치 가문과 늘 경쟁관계에 놓여있었던 팟치가의 성당은 성십자성다에 붙어있지만 별도의 정면과 지붕을 가진 또 하나의 건축사에 빛나는 완벽한 걸작이다.브르넬레스키는 자신이 도나렐로와 함께 로마 여향에서 배운 고대 로마 건축물의 비례를 기초로 하여 내부를 설계하였다. 팟치 소성당은 메딧치 가문의 성당이 산로렌쵸 교회의 구 성구실과 같은 내부 분위기와 천정모양을 보여준다(신 성구실은 미켈란젤로의 설계이다). 같은 건축가가 내부공간을 거의 똑같이 설계한 두 가문의 교회안에서 메딧치가와 팟치가는 매일 서로를 무너뜨리려는 음모의 기도를 과연 하느님께 드렸을까?
성 십자성당을 나와 아래로 내려오면 시민의 광장 피아자 델라 시뇨리아를 만난다. 옆에는 길게 아르노 강의 폰테 벨기오 다리로 뻗어있는 우피치(집정관의 사무실이라는 뜻) 미술관이 보인다. 이 시민의 광장에서 500년전 도미니꼬회의 정열적인 수도승 한 사람이 추종자 몇 사람과 함께 허위 날조된 이단의 죄목으로 공중에 매달려 산채로 화형에 처하여졌다. 피렌체의 개혁자, 교회쇄신 운동의 선구자 사보나롤라가 바로 그 사람이다.
사보나 롤라는 메딧치가의 악정을 비난하였고 사치와 방종에 반대하는 청교주의 자로서 피렌체시를 정화하여 교회의 모범으로 삼을 것을 주창하였으나 결국 부패한 교회의 수장을 탄핵하는 연설로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고 죽음에 처해진 것이다. 시뇨리아 광장을 지나며 억울한 그의 죽음이 5백년 만에 다시 부활하여 교황청에서는 시성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기에 그가 기도 드리던 도미니꼬 수도회의 교회에 들러 기도를 바치기로 한다.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도미니꼬 수도회의 부속 성당이다.
피렌체로 가는 기차시간표를 보면 FIRENZESㆍMㆍNㆍ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피런체 중앙역인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 즉 새로운 성모마리아 성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호 보카치오가 쓴 데 카메론(10일 동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10인의 남녀 주인공들은 바로 이 성모마리아 성당의 미사에서 서로 만난 후 흑사병을 피하여 산장으로 함께 도피하고 잡사를 엮어낸다. 한때 이교회는 젊은이를 위한 교육장으로도 쓰여서 치마부에와 단테로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상 소설의 무대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든다.
프란치스꼬회와 달리 엄격한 교리와 지성을 이념으로 삼았던 도미니꼬 수도회의 성당을 호색문학의 등장 무대로 만든 보카치오와는 달리 미완성된 성당 정면의 상반부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1472)는 수도회의 지적 엄격주의를 반영하고자 고대 신전의 가하하적 비례를 응용하여 설계하였다. 상층부 옆에 부가된 두개의 윈형장식도 자세히 보면 내접하는 가사의 원지름전체의 1/4에 해당하는 작은 원으로 설계되어 있고 소용돌이 치는 동절묘하게 이어주고 있다.
일베르티는 예수 그리스도시대에 활동하였던 비루트비우스의 건축십서 이래 1400년만에 건축에 관한 이론서를 쓴 저술가로도 유명하고 코린트 양식과 이오닉 양식을 결합한 콤포지트 양식을 고전으로부터 인용 정착시킨 사람으로 건축사에서는 빼어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산티크로체상당이 목구조트러스가 노출되어 보이는것과 달리 성당내부는 피렌체 최초의 고딕식 성당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테두리(볼트)보의 색대비는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유입된 동방적 요소로 보인다. 내벽에서 마삿치오의 성삼위 일체 벽화를 비롯하여 기르린다이오,필립보 리피 등 르네상스 기의 중요화가의 작품들을 볼수 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또다른 도미니꼬 수도원을 방문키로 한다.산마르꼬 수도원프라(형제라는 뜻)안젤리코라고 흔히들 부르는 안젤리코 수수의 멋진 부오노 프레스코 그림을 보기 위하여서이다.
산마르꼬 수도원을 대표하는 유명한 도미니꼬 회원은 앞서 이야기한 사보나롤라와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장이 있다.
성 안토니우스는 꼬시모디 메딧치 등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 최초의 공공도서관을 수도원 내에 창설한 사람이다. 1446년 그는 피렌체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수많은 빈민구제채과 기적을 행하여 성인 위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산마르꼬 수도원을 건축한 미켈툿초나 프라안젤리코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청빈과 단순함의 무드는 성안토니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프레스코 그림은 회벽이 마르게전에 색을 침투시켜벽과 일체화시키는 기법으로 고대로부터 동서양문화권 모든쪽에서 전승되어왔는데 우리나라 고구려 벽화도 일종의 프렛코 그림인 것이다. 프레스코는 그 기법상 회벽이 젖은 상태에서 그리는 프레스코 부오노와 마른 벽위에 그리는 프레스코 세코 기법이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은 후자의 것이어서 오랜 세월의 풍상과 전화를 견디기 어렵고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와 반대로 미켈라젤로의 시스틴 천정화는 프레스코 부오노 기법이기 때문에 손쉽게 먼지와 기름 등을 제거하고 복원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수있는 것이다. 프레스코는 벽이 마른 뒤의 색을 가늠 할수 없기 때문에 바사리는 장님이 어둠속에서 색안경을 끼고 그리는 것과 같다는 과장된 표현으로 그 기법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프라안겔리코와 그의 동료들이 프레스코 그림을 그렸던 산 마르꼬 수도원은 그림 보존에 관하여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그 그림은 바로 수사들의 개인침실과 복도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해빛과 풍우에 안전하였고 비교적 전화에도 시달리지 않았다. 프라안젤리코의 가장 유명한 그림「수태고지」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문을 열자마자 나타나기 때문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그토록 유명한 그림이 복도 벽에 액자도 없이 걸려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게 된다.
수도원의 작은 식당 벽에는 기르란다이오의 최후의 만찬이 공간이 연속된것처럼 그려져있는데 이는 프라안젤리코와 그의 동료, 제자들이 그린 그리스도 이야기의 일부이다. 수도원의 모든 방들은 놀랍게도 아름다운 프레스코 그림으로 가득차있다.
프라안젤리코의 본명은 「귀도 디 피에로」라는 설이 있고 1400년경 피렌체 근교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프로필은 아직 확실한 것이 없다. 다만 오르비엣토 대성당에 루카 시뇨렐리가 그린 그림에 그의 얼굴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아마도 오르비엣토 대성당을 지나치지 않는다면 그의 얼굴을 소개할 기회가 생기리라.
시간이 되어 피렌체를 작별하는 순간이 올때마다 미처 다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르네상스의 잔영들이 이쉽기만 하다. 이제 길을 떠나 남쪽의 시에나로 갈것인가 서쪽의 루카나 피사로 갈 것인가…
동전을 던지려는 하늘에 벌써 해가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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