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초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한국무역대표부가 태극기를 내걸었다. 75년 4월베트남으로부터 철수를 완료한지 꼭 17년3개월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자유와 평화수호의 이름으로 베트남의 오랜 내전에 참전했던 한국, 결국 통일 베트남의 전국으로 아니 패전국 미국의 동반자로 쫓기듯베트남을 떠나야 했던 한국으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없을수 없는 날이었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이 운명적 만남은 우리의 역사속에서 또 베트남의 역사속에서도 지울수없는 사건이 분명했다. 불과 17년이라는 세월의 흐름뒤에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새로운 만남의 장을 열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동반자. 그것이 두 나라사이에 흐르고 있던 어두운 과거를 지우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1975년은 베트남에 있어 운명의 해가 된다. 긍정과 부정을 굳이 따지지만 않는다면 이 운명은 새로운 베트남의 탄생임이 분명하다. 오랜 내전을 종식하고「월남」과「월맹」으로 불리우던 두개의 베트남은 비로소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조각난 땅덩어리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히 신나는 일이다. 두개의 베트남으로 나눠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던 과거, 그 치욕과 아픔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베트남의 통일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특히 우리에게는….
그러나「통일 베트남」은「인민」들에게 보라빛 꿈만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적과의 전쟁은 분명히 막을 내렸으나 자신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이 싸움은 통일이라는 엄청난 기쁨을 송두리채 빼았아 가버렸다. 통일은 더이상 인민들의 자랑이 되지 못했다. 배고픔은 여전했고 그나마 있던 자유는「당」이라는 이름으로 그 누가 가져가 버렸다.
오늘의 베트남이 바로 이같은 상황을 걸림돌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베트남을 방문했던 어떤이는 베트남의 시계는 17년 전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표현은 베트남을 보아야만 이해가 가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념으로 무장해야만 살수가 있었던 공상 베트남에 최근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베트남의 개혁과 개방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의 개혁, 개방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더 이상 이념이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17년이 지난 오늘, 베트남은 깨닫고 있음도 분명하다.
전쟁을 매개체로 숙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던 베트남과 한국, 이제 그 어두웠던 역사를 뒤로하고 새롭게 열리는 두나라의 관계속에서 결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분명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엉키고 꼬인 이 매듭 풀기에는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할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의 핏줄, 한국인 2세들에 대한 문제다.
꼭꼭 닫혔던 베트남의 빗장이 열리면서 이미 우리앞에 던져지고 있는 한국인2세, 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따이한2세 문제는 반드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넘어야하는 험난한 강이기도 하다.
이번 취재를 통해 나는 이들과의 만남을 소망했었다. 공식적인 방문대상은 베트남의 나환우였고 또 여러 교회들이었지만 나는 따이한2세를 만나겠다는 예정밖의 일정을 잡아두었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그들의 어두운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전달이 된바 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바로 이들 때문에 베트남은 전혀 낯설지가 않았으며 오히려 친밀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는듯 했다.
그러나 나의 이 작은 소망이루기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여러가지 목적을 짧은 시간안에 한꺼번에 이루고 싶은내 바람은 베트남에선 아직 욕심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지가 않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현지에서 접한 그들의 처절한 현실을 마주대할 자신이 내게 없었다는 것이 보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들을 찾아나서기도 전에 그들의 소식은 내게 닿아있었고 그것으로도 내겐 충분했다. 그들은 이미 잊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조금씩이나마 그들의 문제는 베트남 정부와 우리 민간 단체들에 의해 세상밖으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베트남 정부가 집계하고 있는 베트남의 한국인2세는 2만여명. 물론 어림잡은 수치다. 우리 정부나 민간단체가 파악하고 있는 5~7천명과는 수치상 상당한 차이가 난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표현은 베트남의 한국인2세가 얼마나 되는지 확실하게는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가해질지 모르는 박해를 피해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뼈아픈 과거가 남긴 현실이다.
이들의 생활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베트남 전반에 걸쳐 목격되는 빈곤이 이들이라고 피해갈리가 없었음을 물론이다. 더구나 이들은 통일 베트남에 있어「적」으로 분류되는 한국의 핏줄이었다. 이들이 설 자리는 베트남 어느곳에도 없었다.
따가운 눈총과 억울한 박해를 피해 한국의 핏줄임을 숨겨야 했던 따이한2세. 현재 호치민시에서 한국인 2세의 소재와 신상파악에 힘쓰고 있는 베트남인 미스터 푸는「혈육을 잃어버린 설움에 앞서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현실은 배고픔이었다」고 전해주었다. 그는 제한된 일터지만 이들에게 돌아올 몫은 전혀 없었다면서「지난 17년이 이들에겐 암흑과도 같은 시간이었다」고 증언해주었다.
한국인 2세라는 이름만으로 숨을 죽이며 베트남 사회 밑바닥을 헤매던 이들의 삶이 불과 몇년전부터 부상하기 시작했다. 한국과 베트남을 연결하는 새로운 고리가 마련되면서 이들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수면위로 떠오른 셈이었다.
지난 80년대말부터 민간차원에서 시도되어온 한국인 2세 지원사업은 현재 여러갈래로 추진이 되고있다. 이 과정에서 파악된 우리의 아이들은 7백여명. 호치민시내와 근교에 국한된 수치다. 17세부터 26~27세의 나이로 불쑥 성장했지만 우리의 기억속에 새겨진 이들의 모습은 영문도 모른체 아버지와 생이별 해야했던 젖먹이, 철부지 어린이 그대로다.
이들에 대한 지원사업에 나서고 있는 민간단체들은「기술교육」과「한국어 교육」을 최우선에 두고있다. 경제관계 개선에서부터 다시 열리는 베트남과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볼때 기술교육은 이들이 자립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설수 있는 가장강력한 무기가 될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민간차원에서 전개되고 잇는 한국인2세 지원사업은 그 제한적 성격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될 소지가 많다. 일관성없는 사업내용도 그렇고 그 사업전개에 대한 책임문제가 유발될수도 있다. 이미 작은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 현지에서 이들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는 이들의 염려다. 이들은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이라 하더라도 책임소재가 분명하고 지속적이고 연결성있는 사업내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90년 호치민시의 근교 거주 한국인 2세를 위해 건립된바 있는 푸념기술학교가 운영부실로 문을 닫은 것은 이와 같은 염려로 뒷받침하는 하나의 징표다. 정부차원의 관장사업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정부가 맡아야할 윤리적 도덕적 책임의 한 자락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선택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우리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의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따이한 2세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것은 핏줄 찾기일 것이다. 그것보다 더 진실한 바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 문제는 접어두어야만한다. 그 일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일과 맞물려 있다. 그 일은 또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와 맞물려있다. 결코 쉽지가 않은 일이다.
이념이라는 낡은 시대적 유산에 얽매여 자리하게 펼쳐졌던 베트남 전쟁, 그 끝은 너무나 처참했다. 그 후유증은 너무나 가혹했다. 따이한2세 그들은 어이없는 전쟁의 희생양들이었다. 우리에겐 이 죄없는 희생양들을 우리의 품으로 받아들일 책임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돌이킬수 없는 하나의 유산이기때문이다.
■고침: 제1편「봉인된 십자가」편에서 베트남 입국에 필요한 비자요금 25불이 누락되었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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