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체제 말기 쇠퇴기에 특히 프랑스에서 많은 수도원들이 강압적으로 문을 닫고 해체되었는데 1815년부터는 수도회의 르네상스처럼 여러 분야에서 수도회 활동이 활기 있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즉 옛 수도회들이 재건되고 수많은 수도회들이 새로이 창설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도회 창설이 더욱 배가되었다.
이 시기에 수도회가 전념하고 있는 사도직 활동은 대체로 4가지로 분류되었다.
①중세대에 창설되었다가 해체된 큰 수도회들이 재건되고, 성체신심, 성모신심, 예수성심 신심, 로사리오 신심 등 신자 대중들에게 확산된 여러 신심의 활발한 부흥과 연계되어 근래의 창설된 수도회들과 함께 영성적인 쇄신과 전례의 쇄신을 추구하였다.
②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수도회들이 성공적으로 많은 성과를 이룬 교육활동 ③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뿐만 아니라 유럽의 새로운 그리스도 교화를 위한 선교활동. ④산업혁명으로 야기된 사회적인 변혁의 결과로 유럽에서 상당히 비참한 상황을 경감시키기 위한 애덕과 자선활동을 하는 수도회들로 분류될 수 있겠다.
어떤 수도회들은 가끔 창설된 지역의 교구 차원이나 단순히 본당 차원에만 소규모로 남아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도 각 수도회는 비록 순수히 영성적이거나 물질적인 성격이라 할 지라도 창설 정신에 따라 그 지역, 그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활성화된 수도회들의 사도직 활동은 그리스도교 신자 자체의 도움과 후원만으로도 가능했다.
사실 수도생활과 축성된 재속생활은 사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면 많은 남녀 수도자들이 성직자 신분을 택하지 않고 오로지 봉사활동에 헌신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평신도 자신들이 다양한 신심단체와 자선단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교구 신부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성생활을 심화시키고 사도직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사제단체를 조직하면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수도회들이 여러 분야에서 사도직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이면에는 교회 내에서 약간의 부정적인 문제도 야기시켰다.
주교들의 재치권으로부터 수도회가 자치적인 법적 지위를 고수하고 성청에만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활동함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교황권 지상주의의 비난까지 야기시켰다.
19세기 내내 정교조약 내용 자체가 세속 당국의 임의에 맡겨져 법 집행을 시행케 함으로써 반 성직자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게 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국의 반 성직자주의들도 교육 수도회들에 대항하는 주요 세력이 되어 서로 간에 갈등을 초래하였다.
선교단체들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사업에 적어도 기여하였거나 협력한 그만큼 식민주의자들로부터 환영 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결탁은 세월이 지나면서 유럽 가톨릭 정신의 치명적이 손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도회의 기적적인 발전은 동시대에 가톨릭 정신에서 비롯된 쇄신의 능력과 창의적인 활기의 순수한 징표가 되었다. 그 당시 비오 9세 교황(Pius,1846~1878)은 이러한 현상을 재대로 이해하므로써 여러 수도회들의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진행 중인 모든 작업을 조정하고 새로운 창의력을 북돋기 위하여 1846년에 하나의 특별위원회 설치를 배려하였다.
이후 이 특별위원회는 1908년에 창설된 「수도자 성성」이라는 공식적인 기구로 승격되었고, 현재「수도자 및 재속수도회성성」으로 개편되었다.
교회 내에서 수도회를 비롯하여 여러 계층의 양적인 회복에도 불구하고 교구 성직자는 아직도 신학교에서 충분하지 못한 교육을 받고 있었고 신자 대중들의 모든 필요에 제대로 배려하지도 못했으며 선교와 사도직 분야에서 요구하는 모든 필요에 적절히 대처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수도회들은 교구와 본당 조직에 아무런 변경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수도회들 나름의 적합한 조직을 통하여 교회 내의 부족한 문제들을 훌륭하게 보완하였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수도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수도회 창설자의 정신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당 시대와 지역의 요구와 필요에 맞추어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19세기에 활기 있게 전개된 각 수도회의 사도직 활동은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파악하여 이웃의 요구와 필요에 봉사하여 하느님께 봉헌하는 복음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창설자의 특은과 정신은 박물관 진열장에 전시된 골동품으로가 아니라 수도회의 사도직을 변화된 시대와 문화 전통이 다른 지역에 적응하는 원리가 되어「육화의 신비」가 재현되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이며 수도자들의 삶을 쇄신하는 원동력으로 살아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 회헌은 종이의 낭비처럼 남아 있도다…이렇게 어느 것이든 그 시작을 보고/ 다음 지나온 거기를 살필 양이면/ 흰 것이 검게 된 것을 너는 보리라」(단테, 신곡「천국편」22, 73, 91)는 단테의 노래가 우리 한국 교회의 수도생활에는 해당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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