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주인 부부와 얘기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그들이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 내미는 숙박 수첩에는 각국의 여행자들이 이 숙소에서 머문 소감들을 적어 넣고 있었다. 나에게도 한 자 적어 넣으라는 것이었다.
자기네 숙소에 처음 온 동양인 여자이자 최초의 한국 여행자로서 잘 좀 써 달라고 소박하게 웃으면서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한국 가면 이스탄불에 오는 여행자들에게 이 숙소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니까 주인 부부는 그럼 내년부터는 우리 숙소가 한국 여행자들로 바글거리겠네 하며 즐거워한다.
유럽에서는 싫은 눈치를 보여야 했던 한국이라는 이름이 이 숙소에서만은 이렇게 좋은 인사를 받고 있으니 민간 외교를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드디어 이스탄불을 떠나는 날 너무도 아쉬웠다. 주인 부부의 친절이 너무도 고마워 호돌이 열쇠고리를 하나 선물했다. 그들은 너무도 고마워하며 즉석에서 테이프로 내 이름을 적어 열쇠고리에다가 붙이는 것이다.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받을 수만은 없다며 주인 부부는 나에게 터어키 안내 책자 한 권을 주었다. 한국에 가면 터어키를 많이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아쉬운 작별 인사를 뒤로 하고 나는 처음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기차역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이었는데 먼 곳까지 따라와 주는 터어키 직원이 너무도 고마웠다. 얼마간 남은 터어키 돈을 달러로 환전하는 것도 도와주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기차역에서 내가 탈 기차를 찾아준 것도 너무나 고마울 뿐이었다.
그리스 데살로니카로 떠나는 기차에 오르니 붐벼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덜커덩 덜커덩… 이스탄불은 어두움 속으로 차차 멀어지고 있었다. 너무도 친절했던 숙소 사람들과 친구들까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제는 길고 외로웠던 중동 여행을 끝내고 다시 유럽대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사막과 중동분쟁, 그리고 한국을 모르던 사람들이 무서웠던 중동 여행길, 그러나 차갑게 느껴진 그들의 마음 속에도 따뜻함이 흐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터어키와 그리스의 국경 넘기는 너무도 힘들었다. 잠에서 덜 깬 새벽에 국경역에 다다라서 짐을 모두 가지고 내려야 했고, 여름이라고는 해도 반팔 가지고는 견디기 힘들었던 그 여름의 한기는 정말 눈물겨웠던 일들이다.
그많은 배낭족들 중에서 동양인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나 하나뿐이라는 외로움도 있었는데 거기다가 그리스인이 자꾸 못 살게 굴어서 화가 치밀었다.
다행히도 마음씨 착한 프랑스인이 나를 보호해 주며 위로해 주었지만 나는 서양 아이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6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컴파트먼트식(밀폐된 방) 좌석을 단 두 명이 차지하고 못 들어오게 문을 잠그고 커텐을 쳐놓고, 아예 드러누워 벌써부터 자는 행세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러 인종, 여러 사람들이 사는 곳임을 여행으로써 배우고 있다. 배낭 하나만을 의지한 채 외롭게 행군을 하는 여행이지만 너무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기도 하다.
어디 가서 찾지 못할 잃어버린 시간들이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역마살로 깊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나의 영혼은 언젠가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번 겨울 또 한 번의 역마살을 견디지 못하고 어딘가로 떠날 계획을 하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먼 광야의 나라들을 찾아가고 싶은 소망이다.
지금까지 나의 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리며 다음 기회에 다시 한 번 이런 지면을 통해서 만날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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