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앙화는 외형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무덤과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속을 경고하는 선언이다.
유대아에는 어디를 가나 무덤이 많고 그 무덤형식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땅을 파고 묻은 다음 평평한 돌로 덮어 겉으로 보기에는 평지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다니기 일쑤이다.
또 하나는 좀 고급스러운 무덤으로 마태오 복음서에서 자세하게 기술하는 것 같은 훤칠한 무덤이다. 이 무덤은 얼른 눈에 띈다. 어떤 종류이건 이 무덤에 접촉하는 것은 율법상 부정을 탄다.
여기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교되는 무덤은 후자일 것이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여도 그 속은 송장이 썩은 무덤속이다.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그 위를 다녀도 부정을 타는데 무덤 자체인 사람들의 부정이야 어떠하겠는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실천가로서 조상들의 권위를 등에 업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이론가들이다. 예수의 행동이나 말을 걸고 넘어 갈때는 으레히 이들이 나섰다 (루가 10, 25)
이번에도 이들은 율법준수를 비난하는 예수의 말씀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말씀이 자기들을 모욕하는 말이라고 대들었다. 여기서 모욕한다라는 단어는 함부로 다루며 깔본다는 뜻이다 (마태 22, 6 : 루가18, 32 : 사도14, 5 : Ⅰ데살2, 2). 이 말속에는 자기네들의 권위를 무시한데 대한 교만심이 깔렸다.
이제 제4의 앙화 선언이 이들 율법학자들에게 떨어진다.『너희는 견디기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워 놓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를 자세히 규정한다. 일반 백성들은 이 규정을 면밀히 지켜야했고 그것을 지키려면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야말로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규정을 제정한 율법학자들은 그 규정들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지켰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규정들을 만들어 일반 백성에게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강요가 아니다.
이 앙화선언의 대목은『무거운 짐을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해 주겠다.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짐은 멍에가 될지 모르나 그 멍에는 편하고 가벼운 짐이다』(마태10, 28~30) 라는 예수님의 새로운 사랑의 법과 대칭을 이룬다.
제5의 앙화 역시 율법학자들에게 내려졌는데 병행구를 이루는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 두 분류의 인간들을 위선자로 매도하고 이 둘다에게 내려졌다 (마태23, 29).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과 성자들의 올바른 말씀을 듣지 않고 박해하고 죽였던 것과 같이 살인자의 피를 이어 받은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나서 예수께서 보낼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하신다. 이러한 짓을 하는 자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장식하며 자기들은 그 살인의 가담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 조상들의 살인행위는 느헤미야서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어느듯 엇나가며 반역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주신 법을 내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타이르는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느헤 9, 8).
그들은 조상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과 성자들을 죽일 때의 마음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우고 장식하는 위선을 떨고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무덤을 만들고 장식하는 일이 예언자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것 같지만 예언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은 살인자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을 뿐더러 악한 마음을 음폐하는 위선을 저지르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예언자들에 비할데 없이 더 큰 예언자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
루가복음에서『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밈으로써 너희 조상들의 소행에 대한 증인이 되었고 또 그 소행을 두둔하고 있다』라고 한 것은 마태오복음에서『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자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같은 살불이의 족속들이란 뜻이다.
『내가 그들에게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하느님의 지혜말씀은 루가복음에서는 인용문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그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말씀은 구약성서에는 찾아 볼 수 없고 복음서시대에 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제시한 역사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살해된 즈가리야는 세사람을 들수있다. 셋다 마지막 희생자들이라고 할수 있다.
첫째는 주님의 집 앞뜰에서 돌에 맞아 죽은 여호야다의 아들 즈가리야인데 이 사람은 희브리성서의 마지막 정경 역대기 하권의 인물인만큼 (역대하24, 20~22) 마지막 희생자로 볼 수 있다.
둘째는 마태오가 말하는 바라키야의 아들인데 (마태23, 35) 이 즈가리야는 즈가리야 예언서 저자, 베레키야의 아들 즈가리야를 지칭할 수도 있고 역사가 요세푸스가 저서「유대아 전쟁」에서 언급하는 바리스의 아들 즈가리일 수도 있다.
전자는 12소예언자중 열한번째로 예언시대의 마지막 희생자이며, 마태오는 베레키야의 아들과 여호야다의 아들을 혼돈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자인 경우 즈가리야는 예루살렘 멸망 (70년) 직전 67년에 성전에서 첼롯왕에게 살해됐다.
이 경우 아벨의 살해부터 예루살렘 멸망까지 유대아의 전 역사를 통하여 살해된 모든 예언자들이 포함되고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느님의 복수로 볼수 있어 오늘의 제5 앙화대목과 일치한다.
제6 앙화선언은 마무리 형식으로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저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 가게 하는 율법학자들에게 내려졌다. 지식의 열쇠는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가르켰지만 신약에 와서는 천국열쇠를 말한다(마태16, 19 : 묵시 3, 7).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