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우들의 재산탈취
포도대장은 천주교 교우들을 많이 체포했는데 정부 고위관리들은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자 그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교우들을 그대로 석방하자니 체면이 손상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교우들을 옥안에서 비밀리 교살하거나 고문을 하여 숨지게 하였다.
그러나 체포한 교우수가 워낙 많고 주시하는 사람도 많으므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그는 전술을 바꿔 외국인 선교사들을 체포해 대신들이 천주교 교우들에 대한 심문을 계속 직접 다루지 않을수 없게 하려고 포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외국인 선교사들만을 수색하게 하였다. 새로 임명된 포도대장은 이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교우들을 눈에 띄지 않게 석방시켰다. 철종때 전반적인 박해는 없었으나 지방의 하급관리들이 포졸과 합세하여 교우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깔레 (Calais) 신부의 구역에는 일곱 군데나 교우들의 마을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재산을 약탈당하고 집은 불탔다. 깔레 신부는 연풍 (延豊) 읍내에서 포졸 5명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몸에 지녔던 전대가 찢어져 엽전 몇 백닢이 떨어져 쏟아졌다. 포졸들이 그것을 서로 더 가지려고 싸우는 바람에 깔레 신부는 도망쳐 올수 있었다 한다.
병인박해때 경상도 교우들이 약탈을 많이 당했다. 예천 (醴泉) 고을에 황가 성을 가진 양반이 악한이었는데 재산을 다탕진하게 되었다.
황가는 다른 몇 명의 불량배와 짜고 교우촌을 약탈하였다. 교우들이 합세하여 황가를 한 두번 구타하였다. 황가는 예천 관장을 찾아가 포졸 한명을 요구하여 포졸을 데리고 다니며 교우집에서 양식과 옷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도적들이 포졸 행세를 하고 교우집을 찾아다니며 재물을 요구하는 것을 교구들이 알아차리고 혼을 내어 쫓아버린 일도 있었다.
교우들은 옥에 갇히고 그들외 집은 약탈 당하고 온 마을이 불타거나 완전히 파괴되었다. 교우들은 한겨울 영하 20도나 되는 추위에 돈도 식량도 없이 숨을 곳을 찾아 헤매였다. 노인들은 춥고 여러날 굶어 길을 가다가 한번 쓰러져서는 다시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한다.
■ 사제ㆍ교우 사형집행
사형은 형량과 범죄 성질에 따라 교수형(絞首刑) 참수형(斬首刑) 능지처사형(凌遲處死刑) 거열형(車裂刑) 효수형(梟首刑)으로 구분하고 왕족과 당신관(堂上官) 이상의 양반은 그 체면을 생각하여 사사(賜死 사약을 내리는 것) 하였다.
사제와 교우들에게 거열형은 쓰지않은 것으로 황심 토마스와 황사영 알랙산델을 참수한 후 육시를 하였다 하는데 바로 이형이 능지처사형이다.
한편 왕족인 송마리아와 자부 신마리아는 사사(賜死) 하고 그 외는 양반이라도 교수형 아니면 참수형을 과하였다. 남종삼 요한은 승지(承旨) 벼슬을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참수형을 과하였다. 이조시대 서울보다 지방에서 남형(濫刑) 이 더 많았다. 사형 집행할 때 지방에서 사형 명칭대로 집행하지않고 으레 수형자를 몽동이로 구살(毆殺) 시키므로 효종 때 추살(椎殺) 을 금하였다.
추살이 이미 금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시대 교우들을 사형 집행할 때 사형 명칭대로 집행하지 않는 일이 많았다.
1797년에 인도기 바오로가 순교할 때 망나니들이 거적을 앞치마처럼 두르고 몽둥이로 구살시켰다. 인은민 마르띠노도 망나니들이 큰 돌을 가슴에다 여러번 내리쳐서 턱이 떨어지고 가슴 뼈가 부러져 63세에 순교하였다. 1839년 현경련 베네딕다는 망나니들의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으며 고광성도 도끼에 참수 치명하였다.
법전에 사형이 집행된 후 수형자의 시신은 유가족에게 돌려주게 되어있으며 가족이 없을 경우에는 국가에서 매장시켜 주게 되어있다. 풍속에 의하면 연고자가 없을 경우 수령자가 사형집행될때 바라본 쪽의 마을 사람들이 묻어주게 되어있었다 한다.
박해시대 사제는 물론이고 교우들의 시신도 잘 돌려주지 않았다. 이승훈 베드로는 사형 집행된 후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었으며 신유박해때 심발바라의 시신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외에는 시신을 거의 돌려주지 않았다.
주문모신부는 사형 집행된 후 목은 매달려 있었고 시체는 처형장에 5일 동안 놓아두었는데 사람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아 아깝게도 시신을 잃어버렸다. 1819년에 순교한 권데레사는 순교한지 한 달이 지난 후 에야 유해를 거둘 수 있었다.
앵베르주교와 모방신부, 샤스땅신부는 새남터 현장으로 끌려 갈때 1백여명의 군인이 호송을 하였다. 세분의 귀에 화살을 꽂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횟가루 한줌을 뿌린 다음 광장을 세번 조리돌린 다음 군사 12명이 싸움하는 흉내를 내며 한 차례씩 칼로 목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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