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 너무 긴장했던 탓이었는지, 열이 오르고 몸이 악화되어 갱생원에 온지 5일만에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마리아 수녀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운영하는 도티병원에 입원하여 여러 방법으로 치료를 받았으나, 그동안 여러 합병증으로 악화될대로 악화된 몸이어서 39도를 오르내리는 열은 쉽게 내리지 않았다. 내릴줄 모른채 40여일 동안 계속되는 높은 열로 몸은 춥고 머리는 쪼개질듯 아팠으며 정신은 혼미했다.
또한 입안이 온통 헐어링게르 주사와 물밖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이 죄많은 영혼을 당신 품안에 거두시려는가 보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이었음에 아무런 미련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이 세상.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도 내가 보속해야 할 그 어떤 일이 남아 있었음일까. 예수님의 부활절을 전후로 그동안 내릴줄 모르던 열이 차츰 내리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하면 노동자 농민이고, 그보다 못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조차 소외되어「잊혀진 사람」들이 되어버린 요즘 세상에 그 소외되고 잊혀진 사람들을 치료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했다는 도티병원은 입원환자의 대부분이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성심병원에 있을 때와는 달리 정신적인 소외감도 덜했고, 마주하는 사람들과도 서로 거리감을 느낄수 없어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다. 또한 자신의 아픔과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 죽을 떠넣어주는 병실환자들의 눈물겹도록 고마운 친절은 부족함 많은 내게「인간과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게 했다.
사실 받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진 자의 사랑이란, 그저 생색을 내기 위한 형식적인 겉치레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그런 형식적인 베품은 사랑이 아니라 받는 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값싼 동정일 뿐이다. 인간과 인간이 나누는 참된 사랑이란 있고 없고, 많고 적음을 떠나서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만났을 때 외면하지 않는 관심과 뭔가를 나누려는 마음에서 우려나온 작은 실천, 바로 이런 것이 진정한 나눔이고 참된 사랑이 아니겠는가.
여러모로 이 못난 인간을 염려해주시고 많은 사랑을 나누어주신 병원 식구들, 특히 수녀님들의 정성 어린 기도와 보살핌 덕분에 몇개월 치료를 받으니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이번엔 3년이란 세월을 무릎 한번 구부리지 못하고 침상 위에 반듯이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석고상처럼 뻣뻣이 굳어버린 허리와 녹슨관절을 휠체어라도 타보겠다는 생각으로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시 몇개월후에는 붕대로 몸을 꽁꽁 묶고 휠체어를 탈 수 있었다.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는 고통과 괴로움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선 값진 기도가 될 수도 있음에, 내 삶의 의미를 조금은 찾을 수 있었던 가족적인 분위기의 도티병원에 입원하지도 어느덧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이 이제는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섰음을 예고하는 11월의 어느 주말 오후.
어떤 여자분이 병실로 들어와 나를 찾으셨다. 호감이가는 첫인상이었으나 전에 만나뵌 기억은 없고, 그래서『누구시며, 어떻게 왔느냐?』고 했더니『데레사의 친구인데 데레사에게서 즈가리야의 얘기를 전해듣고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싶어 이렇게 찾아왔다』고 하셨다. 언젠가 나종천 회장님의 소개로 만나뵌 적이 있는 데레사 자매님의 친구이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조금 위셨고 하시는 일은 시내 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시는 열심한 신앙인이셨다.
그렇게 만나게 된 최누님은 그 후로 내 병실을 자주 찾아주셨고,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한 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좋으신 말씀을 해주셨다. 최 누님께서 해주신 여러 좋으신 말씀 가운데『즈가리야, 네 자신을 철저히 죽이고 살아라. 그래야만 지금의 이 생활에서 네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모든 일에 자존심만 앞세우던 내게 얼마나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했는지….
이 못난 죄인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주신 주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에 힘입어 휠체어를 탈 수 있었고, 좋으신 누님도 만나게 된 1984년을 기쁨 속에 잘 마무리하고 1985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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