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경갑룡 주교는 제13회 인권주일을 맞아 12월 4일자로「인간 존중은 민족의 통일과 번영의 토대」라는 제하의 담화문을 발표하고,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정의는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인정 받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경갑룡 주교는 담화문에서 인권 신장은 바로 복음의 요구이자 교회 사명의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인간적인 사회와 민족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선 인권 존중이 선행돼야 하고 이를 위한 각자의 책임 이행이 요청된다고 피력했다.
경 주교는 또 담화문에서 영광 원자력 발전소 3, 4호기 부실공사에 대한 의혹 규명과 외국인 노동자 처우 개선, 철도와 지하철 파업 관련 해고 구속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 간첩 조작사건과 양심수문제 등에 대한 유감과 함께 이의 조속한 시정을 촉구했다.
경 주교는『의료 기술과 모든 법의 목적이 인간을 위한 봉사에 있음』을 재차 강조하고『인권의 전제 조건인 생명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형법 개정안 제135조의 삭제』를 거듭 요청했다.
북한의 인권 상황과 관련, 사상범 수용소와 같은 북한에 상존하는 각종 인권 침해 사례에 우려를 표명한 경 주교는 불의하게 고통 받는 이들의 인권이 조속히 회복되길 희망하면서 북한에 진정한 종교의 자유가 증진되기를 기대했다.
◆정평위 제13회 인권주일 담화(전문)-인간존중은 민족의 통일과 번영의 토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1982년 대림 제2주일을 인권주일로 선포한 이래 이제 그 열세 번째를 맞이하였습니다. 인권주일로 지내는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루가 3, 4)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 끝날까지 펼쳐 나가야 할 사명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정의는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인정 받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존귀한 존재이고, 인권의 신장은 바로 복음의 요구이자 교회 사명의 으뜸 자리를 차지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절도를 잃고 도의를 상실하였습니다. 부모살인사건, 지존파사건, 성수대교 참사 등 끔찍한 일들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실감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사회와 민족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권 존중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각자의 책임 이행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①가정은 사랑과 생명의 보금자리로서 우리의 미래가 이 가정에 달려 있습니다. 유엔이 정한「가정의 해」는 저물어 가고 있으나 가정다운 가정을 실현해 나가려는 노력은 우리 모두의 지속적인 과제입니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자녀들의 올바른 인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한 교육의 시작은 바로 태교인데, 오늘의 부모들은 낙태를 통하여 사랑과 책임이 아니라 불의와 폭력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인권의 전제 조건인 생명권을 임신되는 순간부터 보호, 존중하지 않는 한「도덕성 회복」과「정의 구현」의 외침은 공허할 뿐입니다. 연간 1백50여만 명의 태아가 살해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모두가 함께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료 기술과 모든 법의 목적이 인간을 위한 봉사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모자보건법을 모태로 하여 낙태 일반화를 가능하게 하는 형법 개정안 제135조의 삭제를 거듭 촉구합니다.
②바른 생활, 공정한 생활은 사회 공동선의 본질입니다. 부정과 비리가 공동선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수대교의 붕괴 참사는 국민의 생명이 직결된 공공공사 현장의 덤핑 입찰, 부실 감리, 구조적 뇌물 비리 등의 부조리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실공사에 정부도 책임이 있으며, 당국의 안일무사한 비밀 행정과 관리 소홀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더욱 우려를 자아내는 것은 한반도 전체의 생존권과 직결된 원자력 발전소 시공에 대한 의혹입니다. 특히 최근 완공하여 시험 가동에 들어간 영광 3ㆍ4호기가 부실공사였다는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원전 시공업체의 뇌물문제가 이미 보도된 바 있고, 원전사업은 그 어느 분야보다 많은 것을 감안하여 볼 때 원전의 부실공사 의혹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정부는 마땅히 원자력 발전소의 정보 공개와 엄정 감리 및 관리를 보장하여야 합니다.
③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결코 생산의 수단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 비인간적인 대우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산재 불처리, 임금 체불 등은 명백한 기본권 침해로서 그 대상이 비록 불법 체류자라 하더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금년 2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되었지만,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문제의 대안으로 채택한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제도는 그 발상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더욱이 임금 체불, 폭행, 산재 등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들의 인권문제는 더욱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정부가 이러한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 내지는 적극적인 검토로 대처해 나가기를 촉구합니다. 노동자 스스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함은 물론이고 정부와 고용주도 모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6월의 철도와 지하철 파업 이후 노동자들 3,360여 명에 대한 구속(21명), 해고(165명) 등 과도한 징계 조치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이 땅의 산업 평화를 위하여 원만한 해결을 기대합니다.
④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상처 난 분단의 아픔을 화해와 교류로 치유해 나가면서 다가올 통일을 위해 먼저 인간을 존중하자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남한과 북한에 상존하는 각종 인권 침해는 심히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남한에는 상당수의「양심수」「간첩조작사건」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가 하면, 북한에는 인권의 사각지대인 사상범 수용소, 시베리아 벌목지 등의 인간 이하의 생활이 이미 수 차례 폭로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불의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인권이 하루 속히 회복되기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북한에 진정한 종교의 자유가 증진되기를 기대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 받을 때 거기서 비로소 참된 자유와 해방은 가능한 것입니다.
⑤1995년에는 제4차 세계여성대회가 베이징에서 열립니다. 우리는 이 대회가 여성의 기본권 향상에 기여하기를 기대하면서도 여성 본연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한 채 낙태까지도 마치 여성의 기본권인 양 오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상대적으로 많은 권리를 침해 당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남녀 성 차별에서 오는 불의는 법과 제도 차원에서 시정되어야 하며, 동시에 오래된 인습과 전통에 따른 차별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러한 차별의식으로 말미암아 여아들이 무분별하게 낙태되고 있고, 성비의 불균형이란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인은 물론이고 10대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빈번한 성폭력은 직장과 거리 그리고 가정에서까지 여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남성들 스스로 이를 깊이 반성하고 여성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성의 도구화, 인신매매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책임을 절감하여야 하겠습니다.
⑥끝으로 오늘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인간 존엄성 침해에 알게 모르게 동조한 잘못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이기심과 불충실함으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기본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먼저 자신부터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올바른 가치관과 정의 실천을 위해 힘써 나가야 하겠습니다. 정부는 물론이고 교육계와 사회, 홍보 종사자들도 더욱 진실되게 우리의 문화 가치를 되살릴 수 있도록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 다가오는 새해, 광복 50주년에 남녘과 북녘 땅 곳곳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꽃 피도록 인간 존중과 고통 분담에 다 같이 노력합시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는 주님의 이 요청에 귀를 기울이면서 성실과 정의와 사랑으로 민족의 일치와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투신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풍성한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1994년 12월 4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경갑룡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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