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몸이 개운칠 못하고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손가락도 까딱하기 싫을만큼 의욕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빨리 끝내야 할 일은 많은데 만사는 짜증스럽고 피곤하기만해서 능률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슨 병에 걸린게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소화도 잘 안되는 것 같고 변비와 설사가 번갈아 왔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도 생각하면 전에 없이 숨이 차 오르고 잠자다가도 잠이깨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식은 땀을 많이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잘 아는 의사 선생님께 슬쩍 물어 봤더니 나이가 오십이 되면 병원에 가서 한번쯤 종합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후부터는 아무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치 내가 이미 중병 환자라도 된 듯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병원에 가면 틀림없이 중병 선고가 내려질 것같이만 느껴졌습니다. 증세는 그 뿐이 아니라 여러가지였습니다. 소변도 색깔이 탁해보였고 자고나면 손발이 부었다가 낮에는 빠지곤 했습니다. 전처럼 술도 마실 수 없고 맥주 한잔만 마셔도 취기가 오르고 손발에 힘이 쭉빠지는듯 했습니다. 평소에 건강의 측도라 생각했던 담배맛이 뚝 떨어지고 자구 기침도 나고 목에 가래도 많아졌습니다.
내가 아는 개인병원 원장님이 자기 병원에서도 종합진단을 다할수 있으므로 당장 한번 검사를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마고 대답은 했지만 어쩐지 자꾸 미루고 싶었습니다. 바쁜 일들이 있다고 하면서 넉넉히 날짜를 잡았습니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불안해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또 핑계가 생겼습니다. 바로 그날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통보를 받고 얼른 병원에 연락해서 아예 두주간 뒤로 검사를 미루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간에 여름 휴가를 하기로 약속해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함께 휴가하기로 한 신부님들께 누가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가면 무슨 선고가 내릴지도 모르겠고 또 혹시 무슨 다른 검사를 해야 한다며 입원이라도 하라고 하면 여러사람 휴가를 망치는 꼴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회의 취소 통보를 받고도 검사는 미룬채 그냥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휴가 전에 여러가지 주변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났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어영 부영 날짜만 지나갔습니다.
나는 이제 병원에 가서 중병 선고받을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나는 지금까지 너무 몸을 돌보지 않고 건강에 대한 자신만 가지고 살았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몇몇 친한 사람들에게 내가 종합진단을 할것이라 얘기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말에 무관심했습니다. 내가 담배맛이 떨어졌다고 말해도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은 잘 됐다고 하면서 이 기회에 담배를 끊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야속하고 서운했습니다.
휴가동안에도 이번 휴가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나고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휴가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으며 어쨌든 휴가동안은 오로지 휴가를 맘편하게 지내기로 매순간 다짐했습니다.
병원에 가는 날 맘을 단단히 먹고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태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수십번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조마조마 했던 것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검사 결과는 싱거웠습니다.
단지 몇가지 수치가 약간 이상이 있지만 과음하지 말고 담배만 끊으면 걱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얼른 집에와서 더워도 식힐 겸 단숨에 맥주 한깡통 마시고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더니 그 맛이란 기막히게 좋았습니다. 갑자기 의욕과 힘이 솟는 것 같았습니다. 종합검사는 중병 선고만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건강선고는 기쁨과 흥분을 가져다 주며 삶의 의욕도 생기게해줍니다. 교회의 전례는 주일마다 차츰 종말을 향한 말씀을 거듭 들려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종말을 잔치와 연계시키고 계십니다.
잔칫집에서 신랑 신부를 맞이할 준비를 다하고 기다리다 맞이 할 때처럼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다 하고 기다리다 주님을 맞이 한다면 잔칫날의 그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종말의 선언은 단죄와 단죄에 대한 두려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잔칫날같이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과 흥분도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서 나더러 『의사가 담배를 끊으라고 했는데 왜 의사가 시킨대로 하지않고 계속 담배를 피우느냐』고 야단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의사도 성당에서 신부가 시킨대로 다 안 듣는데 신부는 왜 병원에서 의사가 시킨 대로만 따라야 하는가?』라고 응수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말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위해서 말하듯 신부도 신자를 위해서 말합니다. 『술 담배가 몸에 나쁘다고 하면서 술 마시고 담배를 피는 의사가 있듯이, 말하는 것과 같이 훌륭하게 살지 못하는 이 가련한 신부를 신자들이여, 용서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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