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당신을 믿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에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믿음의 효과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으로 전교활동을 끝내는 것으로 복음서는 일단계를 마감하고 수난의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추기(追記)식으로 가난한 과부의 두 푼 헌금하는 이야기를 삽입시키고 있다. 이 이야기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복음 사가들이 사도시대의 초생교회를 염두에 두고 기록한 삽화이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세와 십일조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 금고가 마련되어 있고 이 금고는 여성 내정에 면하여 있다. 그리고 이 금고에는 나팔 모양으로 된 열세 개의 헌금통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자진해서 내는 헌금통이다. 이 헌금은 오로지 하느님께 바치는 번제물을 드리는 데만 사용된다.
예수께서 헌금통 맞은 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헌금은 공개적으로 했을 것이다.
물론 부자들은 많이 넣고 가난한 이들은 조금 넣는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위선자들은 돈을 많이 넣고 그 대가를 얻는다. 그것은 돈을 많이 헌금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하느님께 바치기보다는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가난한 사람, 특히 가난한 과부는 푼돈 밖에 바칠 수 없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는 두 렙톤을 넣었다. 이 돈은 아스라고 하는 동전의 4분의 1 값이고 노동자의 하루 품값의 64분의 1에 해당되는 보잘 것 없는 돈이다.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
남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헌금하는 부자가 많은 돈을 내는 마음과 가진 것을 몽땅 털어서 하느님께 바치는 가난한 이의 마음은 사뭇 다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톤 값은 하느님께 엄청난 보화가 된다는 교훈을 하셨다. 넉넉한 데서 떼어낸 얼마와 구차한 가운데서 몽땅은 정성의 견지에서 큰 차이가 있다.
복음서에서는 루가가 과부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언급하는 대목이 많다. 그리스도 탄생시에 구세주를 기다리던 과부 안나(루가 2, 36~38)가 있고 심한 기근에서 구원 받은 사렙타의 과부(루가 4, 26), 나안이라는 동네에서 예수께서 어떤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 이야기(루가 9, 11~17), 사회적인 경멸 속에서 재판관을 찾아간 집요한 과부(루가 18, 2~5),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헌금하는 과부 이야기가 나온다.
루가 복음서에서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는 것은 과부들이 동정 받아야 할 사람들 중 한 부류로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사상은 구약성서에도 나타나 있는 것으로 율법의 본 취지는 과부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 있다.『하느님은 나그네를 보살피시며, 고아와 과부들의 피난처이며 도움이시다』(시편 146, 9)고 하였고 그들에게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은 그대로 갚아주시는 판관이시며(출애 22, 21~23) 그 악인들을 저주하신다(신명 27, 19).
반대로 과부를 돌보는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약속 받는다(예례 7, 6) 과부에 대한 하느님의 가호와 축복은 주로 예언서와 신명기에 명시되어 있는데 과부들의 밭 경계선을 침범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잠언 15, 25), 레위인들과 마찬가지로 십일조세 분배를 받으며(신명 14, 29: 26, 12), 밭의 곡식, 올리브와 포도 수확 때 남은 이삭은 나그네, 고아, 과부의 몫으로 남겨 두도록 규정되어 있다(신명 24, 19~21).
그리고 그들은 추수축제와 장막절과 칠주간 축제 만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신명 16, 11ㆍ14: 14, 19: 26,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 사회와 예수 당시 사회는 과부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했으며 심지어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로 그들의 재산을 등쳐먹는 따위의 행위가 자행됐다(마르 12, 40: 루까 20, 47).
희브리 말로 과부라는 말 자체가「냉가슴 앓는 벙어리」라는 경멸의 뜻을 나타냈고 과부 옷을 따로 입히기도 하였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 부자들과 비교하며 과부의 헌금 행위를 칭찬하는 것은 부자들을 책망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앞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고아나 과부들에 대한 보살핌을 명심하라는 부수적인 훈시를 내리는 데 뜻이 있다.
과연 사도교회 이래 교회는 과부나 고아와 같은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사도 6, 1: 9, 36~41: 디모 전 5, 3~16). 초대교회 교전집(Church Orders)에는 과부들의 보살핌에 관한 자세한 규율을 제시하면서 이미 과부들을 돕는 조직체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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