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오리게네스는 백과사전과 같은 지식과 놀라운 창의력을 지닌 천재적인 인물로서 초대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라 할 수 있다. 185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신자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끌레멘스가 지도하던 교리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의 부친 레오니데스가 202년에 순교하였는데, 순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있는 오리게네스는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옷을 감추면서까지 극구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를 따라 순교의 길을 것었을 것이다. 마침 교리학교의 교장이었던 끌레멘스가 박해로 인해 피신 중에 있었기 때문에 데메트리우스 주교는 203년에 오리게네스에게 학교의 책임을 맡겼다.
①제1기 : 203년부터 231년까지 교장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낸 28년간은 그의 생애의 전반기에 해당한다. 에우세비우스는 그의 생활과 교수방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가르친 바를 실제로 실천하였고, 실천한 바를 가르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활을 모방하려 하였다. 그는 가능한 한 학문연구에 몸바쳤으며, 때로는 단식의 체조를 하고 때로는 아주 적은 잠을 자고, 침대에서 자려 하지 않고 바닥에서 잤다. 복음의 말씀을 생각하여 두 벌의 겉옷을 갖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았고, 또 앞날을 걱정하지 말라는 권고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려 하였다』(교회사 6, 3). 그리고 마태 19, 12의 말씀을 문자대로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여 고자(鼓了)가 될 정도였다. 오리게네스가 가르친 내용은 수사학 물리학 수학 지리학 천문학 희랍철학 그리고 신학 등 다방면이었다.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그는 초급반을 헤라클라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상급반을 맡아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데에 전념하였다. 212년 로마에 여행하여 그곳의 주교 제피리누스를 만나고, 또한 로마의 최고 신학자인 히뽈리뚜스와 만나 신학적 교류를 가졌다.
215년에는 아라비아에 가서 로마 집정관을 가르쳤으며, 다시 알렉산델 세베루스 황제의 어머니 율리아 맘메아의 초청을 받아 안티오키아에 가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216년 카라칼라 황제가 자기 동생 제타의 암살에 격분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파괴하자 오리게네스는 팔레스띠나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체사리아의 주교와 예루살렘의 주교 등 지역 주교들이 그에게 성서 강의와 강론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주교는 평신도가 주교들 앞에서 가르치거나 강론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오리게네스는 이에 순명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5년 후 그는 데메트리우스 주교의 명을 받고 그레치아로 가던 중 체사리아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의 옛 친구인 예루살렘의 알렉산델 주교가 그에게 사제품을 주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 주교는 자발적으로 거세한 오리게네스가 받은 사제품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231년에 열린 주교회의를 통해 그를 파문하였다. 그리고 오리게네스의 옛 보조자였다가 232년에 데메트리우스의 주교직을 계승한 헤라끌라스도 그를 같은 이유로 파문하였기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 했다.
②제2기 : 이때부터 오리게네스의 생애의 후반기(232~253)가 시작되는데, 그는 고향을 떠나 체사리아에 와서 그곳 주교의 배려로 약 20년간 신학연구와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여기에서「기적의 그레고리우스」라는 훌륭한 제자가 배출되는데, 그가 학업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 스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남긴「송별사」를 통해 우리는 오리게네스의 인품과 교육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데치우스 황제(249~251년 재위) 박해 때에 오리게네스가 체포되어 극심한 옥고를 치른 사실을 에우세비우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에 오리게네스는 감옥에 감금되어 온 몸에 고문을 당하고 감옥 제일 밑바닥에서 족쇄에 묶여 고문을 당하는 등 얼마나 잔혹하고 수많은 형벌을 당해야 했던가! 여러날 동안 그의 발은 고문할때 사용하는 통나무로 된 네 번째 굴에 묶여 있었으며, 태워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원수들이 자기에게 자행하는 그밖의 다른 모든 형벌도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한편 재판관은 자기의 재량권을 다 동원하여 오리게네스의 목숨만은 구하려 하였다. 그 후 그는 위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요긴한 많은 글들을 남겼는데, 그가 써보낸 많은 편지들은 이 모든 사실이 참되고 명확하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교회사 6, 39, 5). 출옥 후에 오리게네스는 옥고의 휴유증으로 고생하다가 253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③오리게네스에 대한 평가 : 그는 엄청난 수의 저서들을 남겼다. 경제적 후원자인 암브로시우스는 그에게 7명의 속기사를 주어 그의 말을 받아쓰게 도와주었다. 예로니무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저서가 2천권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 중에 많은 저서들이 상실되었다. 오리게네스는 이처럼 많은 저서들을 통해 창조적인 신학사상들을 남겼지만, 생전에 시기와 질투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듯이, 사후에도 논란이 될 몇가지 학설 때문에 몇 세기들 두고 소위「오리게네스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오랫동안 가르친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띠나의 체사리아에는 그를 열렬히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으며, 그래서 이 두 곳은 오리게네스 신학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에 못지않게 많았으므로 양 편의 신학논쟁은 세기를 두고 계속되었다. 사실 동방교회의 신학 발전은 이런 논쟁들에서 나온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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