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중 4주일부터 오늘까지의 주일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전하고 있다. 산상설교란 크리스찬의 행동강령이다.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를 말씀하시지만 가장 큰 주제는『너희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라』는 말씀이다. 실천사항을 한마디씩 살펴보자. 우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이 구절은 출애급기의 말씀인데『누구든지 남의 목숨을 앗아가는 자는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발에는 발로, 상처에는 상처로, 화상에는 화상으로, 멍에는 멍으로 갚아야 한다』(21, 23~25)는 내용이나. 보복이 두렵다 해서 범죄의 욕구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방법 밖에는 도리가 없다. 오늘의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대로 해석하면 인간의 권리는 삽시간에 악인들에게 짓밟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른 뺨, 왼 뺨 대라, 속옷을 벗어주라는 말씀 등은 사랑하라는 표현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동네 뺨이 되어야 하고 속옷 벗어 벌거벗고 다니라는 말씀이 아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이다.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이 크고 작은 여러가지 용무나 요구를 해올 때 지장이 없는 한 선의로써 -성녀 데레사의 말씀처럼「가장 아름다운 미소」로써- 그것을 다 받아 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온유하게 사랑하고 살 수 만은 없다.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고칠 수는 있지만, 올바른 해석을 해야한다. 사랑이 죄를 예방하고 악을 바로 잡아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경찰이나 감옥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되고 폭력을 참고 견디는 것이 최선의 태도라 할 수 없다. 악인의 마음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동안은 폭력을 참고 견디어도 좋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는 말씀이 있다.
원래 거지 근성이라는게 있다. 두 가지인데 받기만 하려는 것과 안 주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현명하게 나눔을 실천하지 못할 때 거지 근성만 키워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주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씀들은 큰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지킬 수는 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원수란 누구 인가?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앗아 가거나 신체, 재산상 엄청난 손해를 입힌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서 구약의 율법도「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레위 19, 18)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사랑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증오의 대상인 원수를 사랑하란 말인가? 내 아들을 죽인 사람, 내 돈 몇 천만 원을 떼어 먹은 사람, 우리 땅을 빼앗은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 광주 항쟁때 아무 죄없는 내 아들, 내 아내를 총 칼로 무참히 난자해 죽인 살인 군부를 어떻게 사랑하란 말인가?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은 행동강령이 아니고 하나의 도덕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실천하라고 강조하신다. 남들처럼 미워하고, 앙갚음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이방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말씀하신다.
이런 얘기가 있다. 한 형사가 있었는데 외출한 틈을 타 강도들이 그의 집을 습격하여 부인을 죽이려 할 때 부인이 『두 살 난 내 딸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걸했다. 부인을 죽이고 난 후 딸도 죽이려는 순간 딱하게 보여 죽이지 않고 강도 두목이 이 아이를 데려다가 15년 동안이나 길렀다. 후일 그 두목은 회개하여 목수일을 배워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집 한 채를 청부받아 건축하게 되었는데 계약 하려고 마주앉아 대면하니 자기를 잡으려던 옛날의 형사였다. 형사는 그를 체포하려 하였다. 이때 목수는 자기가 맡아 기른 딸 이야기를 하였다. 형사는 자기의 딸을 찾게 되자 딸을 길러준 은인을 잡을 수가 없었다. 원수를 용서한 것이다.
사실 그렇다. 원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처절한 복수의 시대-「이에는 이로」의 시대-가 악순환 될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받은 선에 대해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며, 선에 대해서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며, 악에 대해서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 적(的)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기 이전에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겠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데 원수가 없어야「외나무 다리」를 편히 건널 수 있고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잘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서 기도까지 해주라고 주문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 원수였던 우리 인간을 하느님 앞에 용서시키시려고 오신 것이다. 아버지와 화해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기로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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