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의 자랑, 아니 러시아의 보물「에르미타주 국립 미술관」으로 입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마치 돛단배처럼 생긴「발 싸개」를 신발 위에 덧신어야만 에르미타주 미술관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다. 이 돛단배 덧신은 마루로 제작된 미술관 바닥을 보호하기 위한 미술관 측의 철저한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이 돛단배 덧신, 신발 주머니는 여름궁전, 에카테리나 궁전 등 유명하다 싶은 박물관 미술관 궁전 등지에서 모든 관람객의 신발을 감싸주었다. 우리 신발 크기의 두 배나 됨직한 이 신발 싸개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크기의 관람장 전체를 무거운 발을 끌고 돌아야 하는 인내를 감수해야만 했다.
◆코트 가방 무조건 보관
돗단배 신발과 더불어 러시아의 자랑거리들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불편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코트류의 겉옷과 소지품 가방들은 무조건「압수」(?) 대상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거운 코트나 가방류들을 맡아준다는 데야 군소리 할 필요는 없겠지만 관람에 전혀 불편을 주지않는 옷가지와 꼭 필요한 소지품 가방까지 굳이 맡아주겠다는 친절을 강요 받다 보면 괜스레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친절에는 친절료가 붙게 마련. 거의 대부분의 공연장까지 적용되는 옷가지와 가방 보관에는 얼마 되지는 않지만 반드시 보관료가 따라붙었다. 들어가는 입구 정면에서부터 관람객을 압도하는 대규모 보관소의 풍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관이기도 했다. 보관소가 있는데 보관소를 지키는 일꾼이 없을 수는 없는 법. 예의 그 무표정의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눈짐작을 기준 삼아 맡을 가방과 통과시켜야 할 가방을 당당한 모습으로 가려내고 있었는데 그 기준이 정확치 못해 짜증을 부채질했다.
어쨌거나 에르미타주에서 보낸 한나절의 시간은 아쉬움 속에 끝낼 수밖에 없었다. 런던의「대영박물관」파리의「루브르박물관」과 세계 최고를 다투는 이 미술관은 서구 각국의 미술품 소장으로는 단연 최대라는 그들의 자랑이 정말인 듯 싶었다. 라파엘로의「성가족」엘 그레꼬의「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렘브란트의「돌아온 탕자」마티스의「댄스」그리고 수십여 점에 이르는 피카소의 작품 등등이 세계에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세계 최대 미술박물관
담녹색과 흰색, 그리고 황금빛의 절묘한 조화가 시선을 끄는 외관이나 화려한 장식과 조각품으로 꾸며진 아름답고 웅장한 내부, 그리고 온갖 미술품과 보물이 가득한 에르미타주에 취해 있다 문 밖을 나서면 사람들은 잠시 혼돈에 빠지게 된다. 문 바로 앞에서는 소박하다 못해「꾀죄죄한 현실」이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보물을 소장한 나라의 궁색한 현실, 무엇인가 주제를 알 수 없는 안쓰러움이 러시아 방문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드넓은 전시실을 마치 바람개비처럼 도는데도 진이 빠져 버린 우리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사서 마실 변변한 찻집을 찾을 수가 없음에 속이 상했다. 그러나 유적과 유물, 아름다운 경치의 훌륭한 관광지면 어김없이 들어차「먹자판」을 벌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차 한 잔 마시지 못한 아쉬움은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되었다(우리는 오랜 노력 끝에 전시관 한 모퉁이 조그만 러시아식 카페에서 러시아식 커피 한 잔씩을 마실 수가 있었다).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
레닌그라드는 변덕스런 러시아 여름 날씨를 대표하는 도시다. 따라서 레인코트 없는 레닌그라드는 상상할 수도 없다. 며칠간 청아하게 맑던 날씨가 갑자기 사나워지지 시작했고 미처 두터운 옷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 일행은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여름궁전」이라는 곳에서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표트르 대제가 지어「표트르의 궁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러시아 황제의 여름궁전 중 가장 호화로운 궁전. 1천여 헥타르에 이르는 광활한 부지에 1백44개의 분수와 7개의 공원을 포함하고 있는 여름궁전은 대궁전 등 모두 20여 개의 궁전으로 꾸며진 그야말로 대단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7개의 공원 가운데 절경을 자랑하는「아랫공원」은 곳곳마다 가득한 야외 조각들과 분수들로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방불케 했다. 특히 궁전 앞 대폭포, 그 중앙에 자리한「사자의 입을 찢는 삼손 상」과 사자의 입에서 솟구치는 물줄기는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티켓 구입 하늘 별 따기
여름궁전이 공원의 아름다움으로 그 찬란함을 자랑하고 있다면 푸슈킨시에 자리한 에카테리나 궁전은 호화로운 내부의 장식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곳. 호박의 방, 황금의 방(왕관의 방) 등 이름 속에서 이미 호화로움이 가득 배어나는 이 궁전의 방 가운데 황금의 방에 장식된 금빛 장식은 실제 9kg이 소요됐다고 안내원이 들려주었다. 그 안내원은 2차대전 당시 침략군이던 독일이 철수하면서 벗겨간 호박의 방은 아직 찾지 못했다는 설명도 함께 들려주었다.
물의 도시 레닌그라드는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열리고 있는 음악회 발레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공연들을 보지 못한다면 예술의 도시 레닌그라드 방문은 모두 허사라고도 한다. 우리는 단돈 5천 루블(우리 돈으로 당시 2천5백 원 가량)을 투자, 레닌그라드 최대의 콘서트 홀인「옥차브리스키 대공연장」에서 그 유명한 백조의 호수를 감상하는 행운을 따냈다. 그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기나긴 휴가철에 들어가 모든 공연이 휴식 상태에 있는 한여름의 레닌그라드, 그곳에서 문을 연 단 몇 곳의 공연장 티켓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은 터라 우리의 감격은 도를 더했다.
◆운명의「피의 일요일」
4박 5일간의 레닌그라드 일정은 우리에겐 너무나 짧았다.「유럽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레닌그라드를 노랜한 시인 푸슈킨의 표현이 진정 실감 나는 이 정감 나는 도시는 러시아의 역사를 바꾼 혁명의 발상지라는 또다른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서구 유럽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인 레닌그라드는 그 영향을 바탕으로 제정 러시아를 붕괴시키는 진원지가 된 것이다.
1905년「피의 일요일」이라 불리우는 운명의 날 식량과 자유를 원하는 민중의 본격적인 혁명을 시점으로 1917년 2월, 그리고 10월 이 도시는 레닌을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탄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그 역사는 또다시 뒤안길에 묻히고 있다. 오늘의 레닌그라드는 바로 개혁과 혁명이라는 새로운 혁명의 진원지로서 자신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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