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5월 빠리 근교 베르사이유에서 삼부회가 개최되었을 때 교회와 신생 혁명세력 사이에 아무런 적의가 없었다. 특히 농민들과 결속되어 있는 하위 성직자들은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주요 반항세력의 하나였으며 1백49명의 주임신부와 4명의 주교가 제3 신분을 지지하였다. 그해 여름에 성직자들은 자기네들에게 허용된 옛 봉건제도의 권리와 전통적인 십일조 수입을 폐기하는 등 시민과 농민을 위하여 특전을 단념하는 데 혁명에 동참한 귀족들과 경쟁하였다. 1789년 8월 27일 시민권과 인권이 국법으로 선포되면서 모든 프랑스인에게 양심과 종교의 자유가 보증되었는데 기본 정신은「자유, 평등, 우애」였다.
1790년 2월 13일 비자선적인 모든 수도회가 폐지되고 4월 14일에는 전 교회 재산의 몰수와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 반포되었으며 7월 12일에는 이른바 성직자 공민헌장이 반포되어 11월 모든 성직자에게 공민헌장에 대한 선서가 강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직자의 공민헌장은 성직자의 신분을 세속 당국의 종교 관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오랜 침묵 끝에 비오 6세 교황(Pius VI、1775~1799)은 성직자들에게 공민헌장에 충성 서약을 하도록 강요한 국민회의의 결정을 단죄하였다. 갈리아 주의(본보 1925호 참조, 1994년 10월 16일자)에 동조한 많은 사제들이 충성선서에 복종하였지만 전 성직자의 2/3 가량이 이 선서를 거부하여 대박해가 일어났는데 이들 중 약 4만 명의 신부들이 투옥되거나 유배되고 처형되었다.
1791년 10월부터 1792년 9월까지 지속된 입법의회의 활동 결과 대부분이 지롱드도(Gironde道)출신이며 반성직자주의의 중산층으로 구성된 지롱드당 사람들이 권좌에 올랐다. 그들이 성직자들에게 8일 이내에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선서하도록 강요하였을 때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종교는 조롱거리가 되고 전례 장소는 폐쇄되며 혁명 이전 교회 축일 중심으로가 아니라「혁명과업」에 맞춘 달력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자유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철학적 원리들이 교회의 교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으며 더우기 루쏘와 볼테르 등 당시의 많은 반그리스도교적인 지성인들이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제도적인 종교를 거부하는 데 앞장 섰다. 혁명가 자신들이「이성의 여신」숭배에 조잡한 형태로 종교적인 특성을 가미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의 도구화에 불과하였다. 사실 성직자의 기능과 군주정치의 기능, 종교적인 권위와 정치 권력의 소유의 분리가 서로에게 오히려 유익하다는 점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로베스삐에르 공포정치가 계속되면서「최고 존재」(I’ Etre Supreme)와 영혼의 불멸을 인정하는 선언을 하게 하였다. 1794년 9월에는 종교 행위에 대한 일체의 재정적인 지원을 중지하였고, 6개월 후에는 가톨릭교회에 굴욕적인 법률이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시에 예배 행위가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한(限) 신앙의 실천이 범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1795년 6월 영국군과 프랑스 망명자의 연합군이 브르따뉴(Bretagne) 지방의 끼브롱(Quiberon)만에 상륙하자 이들과의 내통을 차단하고자 반성직주의적 충성서약이 의무화되고 이미 추방된 사제들을 영원히 유배시켰다. 1797년 9월 4일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추방한 성직자들을 더 가혹하게 다루는 정책을 취하고 성직자들이 기존 군주정치에 적대적인 새로운 선서를 하도록 부과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반성직주의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1798년에는 교회령을 침입하면서 직접적으로 교황권을 공격하였다. 비오 6세 교황 자신은 포로가 되어 프랑스로 유배되었고 그 이듬해 8월 29일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혁명 상황에서 프랑스 교회는 교회 역사상 아주 암울하고 참담한 시대를 살아야 했다. 물론 교회는 혁명 세력이 전복하려 했던 옛 체제를 구성하는 요소의 한 부분이었으며 사실 주교들로 구성된 교계제도의 구성원들이 귀족정치와 결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교회 기관은 옛 체제에 의해 지탱된 사회 구조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많은 고위 성직자들은 그들이 군주정치에 집착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직자들이 적어도 초기에는 혁명에 호의적으로 임했다. 제3 신분 혹은 중산층에 많은 하위 성직자들이 동참한 것은 혁명의 발단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프랑스 교회는 17~18세기에 선교활동을 전개한 여러 지역에서 열성적으로 실천적인 신앙을 촉구하며 신앙의 쇄신을 불러일으키는 등 아주 활력적이었다.
권좌에 오른 나폴레옹은 교회와의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1801년 정교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전문에서 가톨릭교가 프랑스의 전통적인 신앙이라는 점이 선언되고 몰수된 재산을 교회가 포기하되 국가가 주임 신부들의 봉급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필요 이상의 호의는 늘 모종의 타협을 전제로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교회가 정치 권력에 과도히 밀착되어 필요 이상으로 특혜를 받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당국의 무비판적인 나팔수로 전락하거나 당국의 비도덕적인 행태를 못본 체 해야 하는 경우가 쉽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 계급에 밀착되어 많은 특권을 누렸던 프랑스 교회는 그 권력의 쇠퇴와 같은 운명을 겪어야 했다. 이제 프랑스 교회는 어두운 권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복음의「자유」, 복음의「평등」, 복음의「형제애」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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