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경공·경조 반대
중국의 경서(經書) 중에 천(天) 과 상제(上宰) 는 조물의 뜻이 있다는 마태오 릿치의 주장은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반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또한 선교에도 많은 효과를 거두었으나 그가 죽은 다음 문제가 되었다.
마태오 릿치가 1610년 서세한 다음에 마태오 릿치의 후임자 롱고바르디(N.Lonogo Bardi)는 마테오릿치의 천(天)과 상제(上帝) 는 조물주의 뜻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예수회 회원들 중에도 롱고바르디 의견에 따라 경공 (敬孔) 경조(敬祖) 는 미신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632년 도미니꼬회 안젤로 코치가 중국 복안(福安) 에 와서 개교(開敎) 하였으며 다음해 같은회 모랄레스 (중국명 黎玉範) 와 프란치스꼬회 까바레로(중국명 利安當) 두 신부가 복안에 증원 되었다. 이 두 신부가 적극적으로 경공 경조 반대 운동을 벌였으며 이것이 점점 확산되었다. 또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회는 구라파에서 전통있는 수도회이므로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다.
도미니꼬회에서 중국 교우 11명을 불러 제사에 관한 것을 묻고 제사를 미신 행위로 간주하고 교우들로 하여금 제사를 못지내게 하였다.
교황 글레멘스 11세는 1715년 3월 19일 일체의 제사를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 신주 불태워 큰 파문
정조 때 진산군 (珍山郡)에 천주교 교우 윤지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 뒷 뜰에 묻었다. 1791년 어머니 권씨가 돌아가시자 상주로서 모든 예의범절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으나 오직 어머니 위패 만을 만들지 않았다.
추관지 (秋官志) 에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근래 서양학의 사설 (邪說)이 세상을 유혹하고 백성을 속이며 윤리를 멸망시키고 강상 (綱常)을 어지럽게 하옵니다. 진산군에 거주하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는 것도 부족하여 사당의 신주를 태우고 그 어버이의 사체를 유기하였다 합니다…<생략>』
『어버이의 시체를 유기했다는 것은 낭설이라 할지라도 그 사당에 모신 신주를 불에 태워버린 사실은 본인이 자복하였사오며 그가 말하기를 군부 (君父) 는 배반할지라도 천지의 대부모는 배반할 수 없다하옵니다…<생략>』
신주를 불에 태운것도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인데 군부 (君父) 는 배반할수 있어도 천지의 대부모는 배반할 수 없다는 말은 당시 위정자들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신주를 불에 태운것이 와전되어 부모의 시체를 유기 (遺棄) 했다는 소문까지 났던 것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부대시참형 (不待時斬形)을 과하고 진산군은 5년을 한하여 현 (縣)으로 격하시켜 관의 끝에 두었다.
사형은 추분 (秋分) 후 춘분 (春分) 전에 집행하는 것이 통례 (通例) 이다. 부대시(不待時) 란 이런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형 확정 후 곧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1799년에 순교한 이보현 (李步玄) 프란치스꼬는 당진군 (唐津郡) 고덕면 (古德面)의 부유한 양민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입교하자마자 조상의 신주를 단지에 넣어 강물에 던졌다.
이성지 요한은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 관장이 이요한에게 『너는 조상들을 위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요한은 『저도 부모를 얼마든지 공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에서 잘라온 나무쪽이 어떻게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까?』하고 대답하니 관장은 아무말도 하지못하였다.
■ 제사 대신 연도 드려
신태보 (申太甫) 베드로는 감사 (監司) 의 심문을 받을 때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신주를 모셨느냐?』
『신주는 없습니다.』
『어째서 없는고?』
『몰락한 가정에 독신으로 남아 집도 없어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는 신세라 모실 자리도 없어 가지고있지 않습니다』
『그럼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느냐?』
『제사날이 되면 그저 음식이나 제 처지에 맞게 준비해가지고 이웃사람과 나누어 먹습니다』
『그러면 꿇어 엎드려 절도 하지않고 먹는단 말이냐?』
『절은 하지 않습니다』
박해시대 교우들은 조상의 제사날 음식을 만들어 놓고 교우들끼리 모여 연도를 바친후 음식을 나누어 먹은 듯하다.
1838년 정바오로는 인천에서 살았는데 천주교를 믿기위해 조상의 신주를 부셨는데 일가친척들이 부사 (府使) 에게 고발하였다. 1839년 장사광 베드로는 양근 (楊根) 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서 살았는데 외교인 부모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향교 (鄕校) 의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제명하게 하였다.
지금까지 지필해주신 서양자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차주부터는 지상신학강좌 「교부학」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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