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기 한점 없이 숨막히게 더운 여름 한낮이었습니다. 선풍기 바람이 와닫는 부위가 끈적거리며 땀이 더 나는 듯 합니다. 혼자 있는 방이라 다 벗어 제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복도와 방을 서성대며 들락거렸습니다.
의자에 앉으면 앉는 즉시 닫는 부분이 축축해지며 열기를 느꼈습니다. 샤워를 해도 그때 뿐이고 음악을 틀어도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짜증스런 맘으로 창밖을 내다 보니 도로에는 차들마저 한산한데 수녀님 두분이 느릿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오고 계셨습니다.
비록 흰색이긴 하지만 위로부터 아래까지 감싸고 단정히 머리수건까지 썼는데 두분이 똑같이 양산을 든 왼팔에는 가방을 걸고 바른 손에는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전쟁에 무슨 죄를 지어 저 고생일꼬!』 혼자 중얼거리다 생각해보니 그들이 전쟁에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자발적으로 그런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지. 그러면 내가 동정할 바가 아니지!』
하긴 그들의 고생은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나 윗분이 시키는대로만 해야하고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며 외출을 해도 아무것도 자유로운 것이 없습니다. 규칙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복장을 하고서는 입으로 먹는것, 몸에 걸치는것, 차를 타고 조는것, 잠깐 땀을 씻는 것 마저도 모든 것이 부자유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가진 것이 있어야 할텐데 달랑 토큰 두개로는 잠시 더위를 식혀줄 아이스크림 하나도 사 먹을 수 없습니다. 평소에 그들이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을 떨며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고 종일 움직이며 매일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을 보면 그렇게 가난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돈은 매우 귀중하고 좋은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살 수 있고 누구에게나 존경도 받습니다. 신문사에서도 불우 이웃 돕기에 돈을 많이 낸 사람은 큰 글씨로 사진까지 실어 줍니다. 그러니까 돈으로는 물건 뿐 아니라 명예나 권력까지도 살 수 있습니다.
국회위원까지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아는데 대통령도 살 수 있는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입니다. 돈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쓸 때는 적게 쓰려하고 벌 때는 많이 벌려고 합니다. 따라서 귀하고 소중한 것일수록 비싸게 팔리고 사려면 더 많은 돈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성서 (루가14, 25~33) 는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했으니 이제 무슨 가닥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수녀님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모든 가진 것을 다 버린 모양입니다. 그리고 일해서 생기는 것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다 바치는가 봅니다. 그러니까 아이스크림 사먹을 돈도 없지!
그 돈으로 수녀님들은 고아원도 하고 양로원도 하고 제반 불우시설을 운영하는가 봅니다. 그러고보니 본당에서 일하는 수녀님들의 급여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이 없다고 가족수당 같은 것은 안 주는데, 사실 가족이 있습니다. 본원에는 일생동안 교회를 위하여 일한노인, 수녀님 등 그리고 환자 수녀님들이 있고 장래 수녀들이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계와 치료 및 교육비는 누가 감당해야 합니까?
가끔 수녀님들이 신부님들이나 신자들의 불평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여러가지로 수녀님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그들의 처우를 개선해서 충분한 교육을 받고 사목 일선에 파견될 수 있도록 배려해 줘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그 혜택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꾸짖거나 불평만 해서는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분께 봉사하려고 모든 가진 것을 포기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가로 자기의 모든 것을 지불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과 명예 그리고 가정과 자기자신까지도 귀한 것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 지불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 더위에 아이스크림 사먹을 돈도 없지!
수녀님들은 제자가 되기 위하여 저런 대가를 치루는데 나는 과연 무슨 대가를 치루며 살고있는지 매일 반성할 일입니다.
분명히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와 더불어 나도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함은 사실인데… 부끄러운 느낌이 듭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두분 수녀님은 내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 한낮에 땀나는 생각을 해서인지 온 몸이 그새 푹 젖었습니다. 다시 샤워하면서 생각한 것은 그들의 선택이 헛되지 않기를 틈 나는대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적어도 나 한사람 회개시켰으니 두 분 수녀님은 오늘 예수의 제자 노릇 톡톡히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위에 아이스크림도 못 사먹으면서 싸매고 볼 일 보러다니는 일도 말짱 헛수고는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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