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계획이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언제나 낭패를 면치 못한다. 인간이 자기 생명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궁리해 놓고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것은 확실히 망상에 빠진 계획이다.
인생에 대해서는 자기 계획이 필요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특히 생명의 들어봐야 하고 특히 생명의 운영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불가사의한 섭리를 고려에 넣어야 한다. 그런데 보통은 다른 사람의 의견도 무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다.
만일 누가 자기의 재주와 노력만으로, 특히 재물 축적만으로 자기 앞날이 보장됐다고 생각한다면 그처럼 어리석고 바보스러울 데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무시하고 헛군데에 마음을 쓰는 자들을 개탄하는 노래가 구약성서 시편14장에서 탄식하고 있다: 「제 속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자들, 어리석은 자들」, 큰소리를 친다마는 죽음이 닥쳐오면 모든 것이 헛되게 돌아 간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재산이지만 바로 그 재산이 그들을 괴롭힐 것이고 바로 오늘밤 죽음의 천사가 찾아오면 재산과 권력도 맥을 못추게 된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에 깔고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의 비유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생생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남의 부러움을 살만큼 많은 딸을 가지고 있는 한 부자는 그 땅에서 소출마저 많이 나와 그의 마음은 흥겨웠다. 그가 땅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땅에서 많은 소출을 내게 하여 풍요로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눈 앞의 재물이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지 모르지만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죽음이 닥치면 어찌할 수 없으니 재물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취하여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는 자기 재산을 정당하게 모은것을 전제로 한다.
아무리 정당하게 모은 재산이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재산이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자기 재산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은 어리석지 않은가.
이야기의 주인공은 재산처리의 시작부터 어리석다.
원래가 부자인듯 자기의 곡식곳간이 이미 있었고 기쁘게 맞은 풍작덕택으로 그곳간은 곡물을 다 쌓기에 태부족이었다. 그러니 부족분만큼 더 지으면 될것을 그는 기존의 곳간을 헐고 크게 새로 지을 궁리를 한다. 하느님이 주신 재물을 낭비하는 성격을 드러낸다.
그가 만일 하느님의 사람이었다면 잉여 곡물을 이웃을 돕는데 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가 말한 대로『가난한 이들의 집, 불쌍한 과부들의 집, 그리고 고아들의 입이 영원히 쌓아 둘 수 있는 곳간이다』. 요새 말로 한다면 자기가 먹고 사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재산이 있으면 사회에 환원했어야 할것이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재산을 후손에게 유산으로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비유가 말하는 대로는『네가 죽으면 그 재산은 누구에게 가겠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은 부자의 바보스러움은 그 재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데 있다.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이제 몇년동안 걱정할 것이 없다』.
셋째 어리석음은 그가 살아 나갈 계획에 있다. 『실컷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 사람을 이기주의자라고 할까, 아니면 인색한자인가. 이 사람은 적확히 철두철미 세속주의자이다. 그러니 바보이다. 놀부와 같이 형제 이웃이 궁핍한 것을 보고도 나몰라라 하고 고개를 돌리는 나쁜 부자인가.
비유의 말씀에서는 그런 비정한 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쁜 부자라고는 할수 없을 것이다.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은「바보 부자」라는 것이다.
재산은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하여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나 혼자 마음대로 놀고 즐기기 위하여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행복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 재산을 어떻게 유익하게 쓸 것인가를 생각했어야 할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날을 즐길것만 그는 나날을 즐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오늘밤 그는 숨을 거두게 될텐데, 어리석은 자.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누가 막으랴. 그의 많은 재산도 막지 못할 죽음을 당할 것이다.
비유의 말씀은 결론을 짓는다: 재산은 자기를 위하여 모으지 말고 하느님을 위하여 모으라. 하느님을 위한다는 것은 바로 이웃을 위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고 의지할곳 없는 사람들을 위하고, 사회의 유익한 일을 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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