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서양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유럽뿐만 아니라 여타 대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역사적인 큰 사건의 하나가「프랑스 혁명」인데 그 혁명의 여파나 영향력의 정도를 크게 평가하여「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역사가들도 있다.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봉건제도가 일찍 무너지기 시작하고 왕권 절대주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러한 왕권 절대주의 체제하에서 봉건 귀족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봉건주 등 귀족들은 자기들의 특권을 위협 당할수록 자기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고자 군대의 고위 직책뿐만 아니라 사법 관직과 고위 성직자 지위에 평민을 완전히 제외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예를 들면 귀족들은 사관학교 입학 자격으로 4대가 귀족이었다는 증명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들의 처사는 중산층 자본가들로부터 오히려 더욱 배척 받는 상황을 자초하였다.
왕권 강화와 봉건 귀족의 몰락 틈새에서 왕의 상공업 장려로 장산층 시민계급의 정치, 경제적인 역할이 상승되었다. 이들은 기회가 주어지면 몰락하는 귀족들의 토지를 사들이고 왕에게 세금을 납부한 후 그 토지에 대한 영주의 권리를 완전히 행사하였다. 이들은 이른바「신 귀족」으로 등장하였다. 이제 혈통에 의한 세습적인「구 귀족」에 비해 자본주의와 왕권 절대주의 강화과정에서 상업, 금융, 법률 지식 및 행정적 재능에 의하여 명사로 등장한 신 귀족의 정치적인 역할이 더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왕은 구 귀족과 신 귀족 사이의 세력 균형이라는 대립을 조장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봉건주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산층 자본가의 정치, 경제적인 역할을 증대시켰다.
중산층 자본가는 왕권 신장과 자신들의 신분적 상승을 위해 왕을 도왔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 중산층에 의해 왕과 구 귀족 모두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 개척으로 새로 재배하기 시작한 옥수수, 감자, 토마토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농작물이 등장하고 새 경작 방법이 등장하면서 농업 생산이 증가되어 경제활동이 더욱 촉진되었다.
경제적 번영이 소비를 촉진시키고 상업을 진흥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이 소비의 한계가 지나칠 때 오히려 물가를 앙등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이 넉넉한 상인과 생산자에게는 재산을 더욱 모으는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도시의 서민층과 농촌의 소작인들에게는 아주 불리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의 물가 앙등과 상업의 발달로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하여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도시 빈민과 농촌 소작인들의 불만은 거의 한계점에 이르러 도시 빈민들의 폭동이 자주 일어나 사회 불안이 더해가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구 체제(Ancienregime) 하에서는 혈통에 의한 출생이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 등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혁명 이전에 프랑스에는 3가지의 신분이 있었는데, 전 인구 2천6백만 명 중 1% 정도가 특권층인 제1신분(고위 성직자 계급)과 제2신분(귀족 계급)을 점유하고 있었다. 이 두 신분이 전 국토의 1/2을 소유하며 교회, 군대, 권력의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 특권층은 대부분의 중요한 세금에서 면제되어, 이로 인한 세수 부담은 자연적으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제3신분의 도시 빈민과 가난한 농민들에게로 돌아갔다.
혁명 이전 정부의 가장 중요한 세금 수입은 소금이었는데 세금 수입을 늘리기 위해 정부는 실제 가격보다 10배나 소금 값을 올려 7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1년에 7파운드 이상 사도록 강요하였다. 먹을 것이 없어도 소금만은 미리 사도록 하였고 토끼나 사슴들이 농작물에 피해를 주어도 귀족들의 특권인 사냥을 위해 잡지 못하도록 하여 이들의 불만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권력 중심과 밀착되어 특권을 누리던 고위 성직자들은 많은 특권을 누리며 살았는데 그들은 사목자라기보다는 가문의 권력과 명예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국민 대부분이 질시하는 지배 계급과 동일시되었다. 수도생활도 창립자의 정신에서 많이 이완된 상태였고 하급 성직자들은 제대로 교육 받지 않은 상태여서 사목자로서의 자질에 크게 미달하였다. 일반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갈리아주의나 얀세니즘, 계몽주의 등의 영향으로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과는 멀어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 교회적인 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쉽게 교회를 떠난 요인의 하나로 볼 수 있겠다.
역사에 있어서「우연」이라는 표현이 많은 경우에 불필요한 수식어에 불과하며 대개는 한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어떠한 형태로든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갑자기 돌출적으로 일어난 이른바「우연적인」사건은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유행가처럼 회오리 바람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역사적인」사건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랑스 혁명도 역시 돌출적으로 일어난「우연적인」사건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립과 분열에 의한 힘은 파괴를 초래하는 폭력으로 드러나지만 자제와 조화를 통해 얻어지는 힘은 서로를 일치시키며 평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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