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서쪽 끝단에 위치한 넓이 4백8㎞의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및 문화 유적이다.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시대부터 외세와 격렬하게 충돌해온 역사의 현장인 강화는 그래서 호국의 기상이 돋보이는 곳이지만 그 와중에서 혹독한 박해를 겪어야 했던 신앙선조들의 믿음과 순교에 이르는 열정을 함께 지니고 있다.
강화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이에 이은 병인박해이다. 어느 박해보다도 극심하게 이루어졌던 병인년의 교난을 야기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이 바로 강화도이다.
강화군청의 적극적인 사업을 통해 말끔하게 관광지로 개발된 강화도는 특히 지난 70년 육지와 연결되는 강화대교가 개통됨으로써 보다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게 돼 있다.
강화지방에서 찾아볼 만한 교회 사적지는 관청리 형방, 갑곶돈대, 황사영 생가와 김포군의 송 마리아 묘 등이다. 강화섬 전체가 하나의 관광지이기 때문에 곳곳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맛 볼 수 있다.
◆「병인양요」의 현장
순례길 틈틈이 전등사, 청련사, 백련사, 보문사 등의 사찰과 강화산성, 마니산, 참성단, 지석묘 등을 찾을 수도 있다. 순례길에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내가, 인산, 길정, 황포 등 입질이 심심치 않은 낚시터도 곳곳에 있다. 충분한 숙박시설과 편리한 교통 등 가족 단위의 주말 성지순례 코스로 매우 적당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신촌에서 새벽 5시 30분부터 저녁 9시 30분까지 매 10분 간격으로 직행버스가 강화읍을 지나 온수리와 내포리까지 간다. 수원 및 과천, 인천과 부평, 부천에서도 직행이나 완행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서울에서 버스 편으로 1시간 30분이 채 못 걸려 강화터미널에 도착하면 우선 가까운 곳에 강화본당이 있어 강화도를 찾는 순례객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울창한 나무들 속에 하얀 건물로 세워진 강화본당 위쪽으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항전하던 39년 간의 궁궐 터가 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 강화 천도와 함께 세워진 궁터에는 현재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 있는데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동헌과 형방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현재 형방은 민가들에 둘러싸여 있고 옛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병인박해의 회오리바람은 강화대교 서쪽 끝에 서있는 갑곶돈대에서 일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강화대교를 건너가다 보면 강화도쪽 왼쪽으로 보이는 갑곶돈대는 1679년에 축조돼 8문의 대포를 설치한 포대가 있다. 조선 숙종 5년(1676) 강화에는 모두 5진 7보 53돈대의 국방시설이 설치됐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 왕조의 프랑스인 성직자 9명에 대한 처형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한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으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지방에서는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던 것이다. 갑곶돈대에서 바라다보이는 바다 건너편의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70년 강화대교 개통
이 박해로 성연순과 원윤철이 통진에서, 1868년 박상손, 우윤집 등이 강화에서 순교했고 1870년에는 통진에서 권 바오로가 순교했다.
당시의 처절한 순교 현장을 아스라히 되살려 주는 갑곶돈대와 건너편 백사장에서 불어오는 때 이른 찬 바람을 뒤로 하고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의 생가 터를 찾는다.
강화읍 월곳리 대묘동에 위치한 생가 터는 강화 터미널 뒤편 강화경찰서를 지나 걸어서 3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생가 터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거기가 거기 같은 지라 찾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경찰서를 지나 20분 정도 직진하면 농협 창고가 왼편에 나오고 그 왼쪽으로 언덕을 올라가다 고개를 막 넘어서면 나오는 갈래길에서 오른편으로 꺾어져 다시 5분 정도를 간다.
거름 더미가 언덕 곳곳에 쌓여 있고 옥수수와 참깨밭이 순례객의 후각을 간지럽히는 시골길을 걸어가다 언덕을 넘어서면 툭 터진 전망 왼편으로 생가 터가 눈에 들어온다.
언덕 위에 서서 멀리 보이는 산들 가운데 가장 먼 산은 북녘 땅. 먼 시간의 간격을 넘어 신앙의 선조와 만나는 자리이지만 가깝고도 먼 북한 땅의 형제들은 역사의 시간보다도 오히려 먼 듯한 슬픈 느낌을 순례객은 갖는다.
◆몽골항쟁 유적 산재
그쯤에서 아직은 깨끗하고 효험 있는 물을 자랑하는「뻴우물」또는「뻬루물」을 찾아 목을 축이고 바로 옆에 서 있는 집 문을 두드리면 나근봉(가비노ㆍ45), 윤영순(엘리사벳ㆍ43)씨 부부가 활짝 웃는 얼굴로 순례객을 안내해 준다.
황사영의 탄생지이자 소년시절을 보낸 대묘동 마을을 대대로 창원 황씨의 세도가 크게 떨치던 곳이다. 말끔하게 단장돼 서 있는 황씨 문중 사당은 이를 잘 보여준다. 황사영의 생가는 흔적도 없고 다만 길게 자란 잡초와 갈대 사이로 약간의 공터만이 그의 자취를 짐작케 해준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고 16세의 나이에 진사에 합격한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의 참담한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자 흰 명주 천에 1만3천 자의 깨알 같은 글씨로 쓴 백서를 썼고 밤을 틈 타 배론을 나서다가 관헌에 잡혔다.
결국 그는 처참한 육시형을 당하고 모친은 거제도, 부인은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로 귀양 가는 비운을 맞았다.
◆순교자 황사영 고향
강화도 외에도 통진과 김포지역에도 신앙의 숨결이 서려 있는 곳들이 군데군데 있다. 1801년 순교한 왕실의 첫 순교자 송 마리아의 묘가 김포군에 모셔져 있는데 통진본당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강화는 굽히지 않는 신앙의 현장이자 역사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약 2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비롯해 단군신화의 유적인 참성단과 삼랑성, 그리고 고려시대 항몽의 역사, 팔만대장경 및 금속활자와 고려자기 등을 꽃 피웠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강화도 조약 등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강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아울러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등 모두 88점의 문화재는 강화를 찾는 순례객들에게 신앙교육 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 교육에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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