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6일 선종한 구천우 신부의 삶은 겸손하고 모범적이고 올곧은 착한 목자의 길이었다 1926년 사제로 서품, 거의 70여 성상을 목자로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구 신부는 일제시대 해방 6ㆍ25사변 전후 복구시대를 거치면서 시대의 격동기와 한국 교회의 질곡과 성장을 지켜본 산 증인이었고 그 자체가 교회의 역사였다.
공교롭게도 구 신부가 지상 교회에서의 생애를 다하고 숨을 거둔 날은 그가 평소에 가장 존경하던 안중근 의사의 의거 85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선포하고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삶을 사제생활 중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평소에 말하고 했던 구 신부는 유언에 따라 강남 성모병원에 안구를 기증, 그 역시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끝까지 보였다.
구천우 신부는 1897년 8월 1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아버지 구옹수(요한) 김병열(아가다)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한 분의 형이 있었으나 일찍 병사 자연히 출생과 더불어 독자가 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외조부의 영향으로 15세에 신학교에 입학 1926년 사제로 서품됐던 구 신부는 현 대전교구 합덕본당 보좌로 발령을 받아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예산본당 중림동본당 보좌를 거치면서 중림동본당 재임시는 본당 부설 학교 교감으로서 개화기 청소년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후 20여 년 동안 고향인 황해도 해주 곡산 신천본당 주임을 맡으면서 황해도 전교에 남다른 헌신을 보였다.
또한 그는 황해도 감목대리구 폐쇄를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 구 신부는 해방 전후 6ㆍ25를 거치면서 소련군 진주와 더불어 북한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겪었고 공산당으로부터 황해도 감목대리구의 첫 제거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북한 당국의 종교 탄압에도「치명정신으로 신앙을 지킬 것」을 강조했던 강직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불온 문서 작성 혐의로 구속돼 필사의 탈출을 시도 38선을 넘었으며 1ㆍ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지에서 은경축을 맞는 파란만장한 역정을 보냈던 구 신부는 본지에 연재됐던「노사제 회고」(88년 1월 31일∼12월 11 게재)를 통해『고 노기남 대주교와 7∼8명의 신부들이 마련해준 은경축 축하 상을 받고 그간의 노고가 생각나 울고 싶은 대로 울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전후에는 구호 물자를 활용 안양본당을 짓고 안양지역에 전교의 싹을 틔웠으며 레지오를 조직하고 유치원 건립에 힘 쓰는 등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활동을 격려했다. 63년부터 신학교로 임지를 옮겨 영성 담당으로 후진들을 양성했던 구 신부는 75년 은퇴를 하고 논현동 청담동을 거쳐 개포동에서 거주해왔다.
은퇴 후에도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등 자신의 임무를 다하였고 성 목요일 미사와 교구의 사제서품식 등에 잊지 않고 참여 후배 사제들에게 든든한 원로 사제의 모습을 보였었다.
구 신부는 무엇보다 평생을 가난의 덕을 실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그 모범을 보여온 것으로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 이들은 소박하게 겸손되이 보통사람 중의 보통사람 자세로 일생을 살았던 사제였으며 원칙에 충실하고 강직한 가운데 교회 사랑이 지극했다고 말하고 있다.
국민학교 시절 곡산본당 공소 회장이었던 외조부 댁에서 구 신부를 처음 대한 이후 60여 년을 선배 사제로서 또 가족처럼 대해왔다는 이경재 신부(성 라자로 마을 원장)는『신자들에게도 착한 목자셨고 권위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며『그리스도의 가난을 그대로 받아들이셨고 후배 신부들에게도 말로써가 아니라 그 삶 자체로써 표양을 보이셨다』고 회고했다.
20여 년을 곁에 모셨던 외조카 김보옥(이사벨라)씨는『그러나 신앙적인 면세서는 아주 철저한 모습을 보여 복사들에게 매를 들 정도로 엄한 사제이기도 했고 제의나 성물도 지난 8월 4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실 때까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정리했다』면서『항상 식사는 밥 반 공기 정도였고 과식하는 법이 없었다』고 들려 줬다. 함부로 물건을 버리는 것이 없으셨고 배가 고파도 배 고프다는 소리를 못할 정도로 얌전한 분이었다고 덧붙인 김씨는 기력이 없는 가운데도 미사는 반드시 서서 봉헌할 정도로 철두철미했다고 말했다.
인생의 목적을 가장 아름답고 복된 삶을「사랑을 사는 것」이라고 꼽았던 구천우 신부. 그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올 때 완전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던 구 신부는「나는 믿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배우라」는 성경 말씀을 좌우명으로 살았던, 또한 신앙을 곧 자신을 죽일 수 있는「죽음」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던 참 신자요 열심한 사제였다.
88년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던 한국 교회 앞날에 대한 구 신부의 의견을 인용한다.
『한국 교회의 모습은 그런대로 만족할 만해. 그러나 사회 자체가 너무도 급격히 변화했기 때문에 교회가 그 변화를 미처 따라갈 힘을 키우지 못한 느낌도 들지. 앞으로의 진로는 확언하지는 못하겠지만 사제들에게 달린 것이 분명해. 사제들이 지금보다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된 그리스도의 신앙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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