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위령성월이다. 먼저 가신 영혼들의 평안한 안식을 기도할 뿐만 아니라 산 사람들에겐「내일은 나」일지도 모르는, 도둑처럼 다가오는 죽음을 신앙인답게 준비하고 맞이하라는 무언의 뜻이 담겨있는 달이다. 위령성월을 맞아「임종을 지척에 둔 이가 고백하는 죽음」과 함께 이들이 보다 기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호스피스 봉사자의 죽음에 대한 명상」을 소개한다.
◆「선고된」죽음 기다리는 오명옥씨 - 도둑처럼 다가오는 죽음 용서 청하며 준비합니다
하늘나라 입성 첫 관문은 화해
몰핀으로 암 고통 잊으며 기도 생사 주관자 하느님 믿음 “확고부동”
오명옥씨(41ㆍ엘리사벳)가「죽음」의 선고를 받은 것은 지난 3월이었다.
다리가 너무 쑤시고 피곤해「그저 관절염이거니」했던 것은 다름 아닌 암이라는 죽음의 그림자였다. 자궁경부암 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담당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병원을 나오면서 그는 그날 하루를 눈물로 보냈다.
『왜 나여야 하지,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거야. 가난도, 어떠한 어려움도 건강한 몸뚱이 하나로 지탱해온 나에게 이게 무슨 일이야, 죽을 수 없어.』억울함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은 아버지없이 그의 손에서 커온 중학교 2년, 국민학교 6년생인 두 아들이었다.『이제 너희들마저 고아가 되는구나』생각하면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남편을 위암으로 떠나보낸 지 만 9년. 당시 6살, 3살 나던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왔던가. 이제야 조금 살 만해졌는데…무엇보다 『그 끔찍한 암의 고통을 이제는 내가 다시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더 가슴 아팠다.
빚더미 위에서 남편이 죽자 그에게 남은 것은 처절한 가난이었다.
서울 미아리 산꼭대기에서 1백50만 원짜리 방 한 칸 전세를 살았던 그는 취로사업, 파출부, 페인트공, 음식점 종업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당 6천 원을 받고 일하며 하루하루를 그저 근근이 살아왔던 그녀는 일당 4만 원을 주는 페인트공 일에 욕심이 생겨 새벽 4시면 일어나 인천까지 달려가는 억척스러움을 보였다. 일을 한 후 엄습해오는 피로와 무기력이 암이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래 난 죽지 않을 거야 이렇게 조금 아프다가 정말 기적처럼 일어나겠지.』
주문처럼 자신을 세뇌시켰지만 점차 심하게 닥쳐오는 병마의 고통은 그를 절망시켰다. 고통이 지나고 나면「이런 몹쓸 병을 내게 주신 하느님」을 향한 분노가 밀려왔고 분노가 가시면『하느님의 힘으로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더욱이 이런 확신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이들이 그의 옆에 항상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유일한 기쁨이요, 희망이었다.
89년 처음 발병했을 때 수술했던 도티병원에서 만난 한 신자, 92년 현재의 월계동의 영구임대 아파트로 옮겨오면서 만난 구역반장 할머니, 그리고 신부님들과 동료. 가정 호스피스로 자신의 죽음을 도와주는 수녀님들. 가톨릭신문도 호소란을 통해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고 전국 방방곡곡의 신자들이 보내온 성금 1천4백여만 원을 전달했다. 돈벌이가 없는 그는 이 돈으로 근 2년을 살아왔다.
특히 암이 재발하기 전 그가 식복사로 일하며 사귄 한 동료는 그의 사정을 알게된 후 그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두 아들을 키워주겠다고 나섰다. 또한 자녀들의 물질적 뒷바라지를 해주겠다고 몇몇 신부님이 약속까지 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은총인가? 나에게 닥쳐온 죽음이라는 불행 앞에 이렇게 큰 은총이 있을 줄이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매주 그를 방문해 돌봐주던 서울 성가소비녀회의 김현옥 수녀는 그에게 우선『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미워했던 사람이나 잘못했던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 용서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진정 마음 속으로 그들을 용서했다. 그런 다음「자신이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해냈다. 전화로 또는 한 번 방문해 달라고 부탁해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내가 주님 앞에 나서는 과정이며 아무리 잘 살았더라도 누구든 두렵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우리는 생의 끝에서 반드시 가족, 이웃들과 화해를 해야 한다. 용서가 바로 화해로 가는 길이다. 화해가 이루어져야 우리는 두려움없이 기쁘게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주던 김 수녀의 말대로 그는 화해를 이루고 나자 정말 기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됐다. 많은 이웃들이 죽음을 앞둔 사람 같지 않게 밝은 표정의 그를 보면서 오히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병을 지고 하루 이틀 연명할 돈도 없어지고 남의 도움만으로 이렇게 자리를 펴고 앉아있으니 답답해서 빨리 하느님이 데려가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가도 아침이면 설거지에 방 청소까지 하고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면 이렇게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고 더 살고 싶은 욕심도 생깁니다.』
그는 아직도 한 가닥의 희망 속에 산다.『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몰핀으로 암의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틈틈이 기도와 성경 봉독을 하고 있다.
『그래도 난 행복합니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관문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으니까요. 도둑처럼 언제 죽음이 내게로 올 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늘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감사할 줄 알고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언제인지 모르지만 조만간 그에게 다가올 죽음 앞에서 그는 오늘도 기도를 올린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여, 마지막 고통에서 나를 도와주소서.』
◆「천국 가는 열차」승무원 -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정명희씨
새로운 희망 속의 임종 돕기에 심혈
연옥 영혼 안식 위해 매일 미사 봉헌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설 때마다 천국 가는 열차를 탄 기분이 들어요. 이곳 환자들은 천국행 열차를 탔다는 기쁨으로 가득하고 저는 이들을 모시고 간다는 승무원처럼 항상 가슴이 설레요.』
천국으로 가는 열차. 세상 사는 동안 쌓아온 모든 욕심을 벗어놓고 홀연히 떠나는 연습을 하는 곳. 호스피스 병동은 늘 조용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미 8년째 호스피스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정명희(율리안나ㆍ52ㆍ서초동본당)씨는 거의 매일 가톨릭의대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가지만 늘 새로운 마음으로 병동을 들어서게 된다.
여행을 떠날 때 항상 마음이 설레이듯 어떤 손님을 어떻게 맞이해서 희망 속에 환희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도울까 하는 생각이 정명희씨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두려웠고 스스로 죽음을 거부하기도 하며 함께 억울해 했지만 8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죽음은 단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플랫폼 정도로 인식돼 버린 지 오래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 속에 살고 있지요. 환자들은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고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은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기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거지요.』
「새로운 희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호스피스 봉사자인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정명희씨는 호스피스를 한 마디로『여행을 떠나는 여행객의 가방을 잘 꾸려주는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정명희씨는 3년 전 장암으로 선종한 중소기업체 사장이였던 이요셉씨의 죽음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호스피스병동 수녀로부터 3일 간에 걸친 특별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은 요셉씨는 백일을 갓 지난 어린애처럼 얼굴만 마주치면 웃다가 임종시에도 부인과 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웃으며 떠나갔다고 전한다.
물론 임종의 순간에 통곡하는 가족들도 없이 정말 멀리 여행을 떠나보내듯이 가족과의 작별을 고했다고 전하는 정명희씨는 그 후부터 자신이 하고 있는 호스피스 봉사가 이렇게 값진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됐다고 한다.
장기간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81년부터 강남성모병원을 방문하다가 호스피스병동이 생기면서 말기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던 정명희씨.
정명희씨는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하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당에 나가 하느님이 맡겨주신 당신의 아들 딸들을 한 순간이라도 마음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을 언짢게 하지 않도록 이미 자신을 통해 떠난 수많은 영혼들의 안식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강남성모병원에 호스피스과가 생기면서 시작된 제1기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이후 곁눈 한 번 팔지 않고 호스피스 활동만을 해온 정씨는『호스피스 봉사가 이젠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 지 오래다』며『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임종자들의 벗으로 하늘나라를 안내하는 승무원이 되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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