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를 제외한 러시아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이콘과 러시아를 떼어놓고 설명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러시아와 이콘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삼인방」쯤으로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라는 밭을 양분 삼아 러시아는 골격이 갖추어졌고 성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콘은 러시아의 신앙에 깊이를 더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몫을 담당해왔다.
러시아 정교회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선「자고르스크」를 빼놓을 수가 없다. 러시아가 개방의 길로 접어들면서「세르기예프 포사드」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은 자고르스크는 러시아 정교회의 총 본산지이자 중심으로 보면 된다. 자고르스크,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 격인 이 도시는「러시아의 금종」이라는 애칭이 참으로 걸맞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답고 고운 전형적인 교회마을이다.
자고르스크는 가장 러시아답고도 세계적인 관광명소「황금의 고리」가 시작되는 첫 도시다. 모스크바에서 동북쪽으로 73㎞ 거리에 있는 자고르스크는 페라슬라블-잘레스키, 로스토프-벨리키, 야로슬라블, 블라디미르, 스즈달 등 6대 도시들과 하나의 고리 형태로 구성된 관광명소, 황금의 고리가 시작되는 첫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전형적인 교회마을
이 도시와 교회의 주인공은 바로 성 세르기예프다. 러시아 정교회의 아버지이자 러시아 교회의 첫 성인이기도 한 성 세르기예프는 1345년에 트로이체(삼위일체) 세르기예프 대수도원을 이곳에 창건, 주춧돌을 놓았다. 이어 트로이츠키(삼위일체)성당, 우스펜스키(성모승천)성당, 종루, 그리고 모스크바 신학대학 부설 신학교 등이 세워지면서 이들은 각기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자고르스크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약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자고르스크와 만나는 순간 우리의 입에선 탄성이 터져나왔다. 3명씩 앉는 딱닥한 나무 좌석과 낡고 헐어빠진 기차에 대해「험담」을 나누다가 고요하고 아름다운 바깥 풍경에 잠시 취하는 동안 어느 새 나타나는 자고르스크, 다시 기차역에서 10여 분을 걷다 보면 눈 앞에 전개되는 자고르스크의 모든 것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어디 그뿐인가. 중심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삼위일체 대성당으로 들어서면 바로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벽화로 장식된 아름다운 성당 내부에 놀라게 된다. 이 성당의 가장 유명한 명품, 루블료프의 삼위일체는 현재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그 자리에는 우리 눈으로는 진위를 가리기 힘든 모조품이 메워 허전함을 달래주고 있다.
이 성당의 또 다른 자랑은 성 세르기예프 대주교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는 점이다. 타타르 지배로부터 러시아를 구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성 세르기예프의 유해는 매일 오후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방문객과 순례자들을 위해 공개된다. 우리는 운 좋게도 바로 그 시간에 도착, 마지막 순서로 유해를 만날 수가 있었다.
◆「황금고리」첫 도시
황금색의 돔을 중심으로 양파 모양의 푸른 색깔 돔 네 개가 화려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스펜스키(성모승천)성당은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성당을 모방한 성당. 스스로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준 것으로 유명한 이콘,「카잔의 성모」가 바로 이 성당을 지키고 있었다. 1579년 모스크바 볼가강 근처 도시 카잔에서 한 소녀에게 나타난 성모가 성화상이 묻혀있는 곳을 알려주어 발견되었다는 이 성화는 폴란드로부터 러시아를 구하는 데 또 나폴레옹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개인으로부터는 기적의 성모로 또 국가적으로는 나라를 구하는 성모로 유명한 이콘 카잔의 성모는 지금까지도 러시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성모다.
◆예비 사제들의 행진
수도원과 다른 성당들을 모두 돌아보는 데 한나절은 족히 걸리는 자고르스크 방문 중 우리에겐 두 가지의 행운이 따랐다. 첫 행운은 관 내 신학교 학생들이 검은 옷을 날리며 행진, 기도하러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20여 명은 됨직한 검은 옷을 두른 일단의 젊은이들은 젊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검은 수염들이 이제 막 모양을 내기 시작한「예비 사제」들이었다.
◆국민적 영웅「세르기」
대성당과 넓은 마당 하나를 마주하고 있는 아름다운 러시아식 식당에서 진짜 러시아 정통요리를 음미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 행운이었다. 러시아의 마당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스끼드보리크식당은 더운 스프「볼쉬」를 필두로 만두요리인「뻴메니」부침개 격인「블리니」찬 스프「오클로쉬카」그리고 드디어 주 요리인「자꼬르예」와 「찔라찌나」를 가지고 우리를 신나게 만들었다.
그동안 여행비를 절약하느라 신통치 않은 요리와 이미 만들어간 한국 요리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하던 우리에게 있어 이 요리들은 자고르스크의 아름다운 풍경, 성당들에 이어 또다시 우리를 감격시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틀림없는 진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러시아를 하나의 나라 형태로 만드는 데 있어 중심을 이루었던 러시아 정교회는 그 신앙의 힘으로 지난 세월을 견디어왔다. 20세기 초엽의 피의 혁명, 그리고 70여 년의 세월을 숨 죽이고 살았지만 국민들의 마음 속에 신앙의 씨앗으로 머물러온 러시아 정교회는 이제 러시아의 개혁과 그 변화를 가장 밀접하게, 온 몸으로 맞고 있는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고르스크는 모든 러시아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고향임에 틀림이 없다.
비록 기차 삯이 모자라 자주 올 수는 없지만 이곳에 올 때마다「카잔의 성모님」께 러시아의 오늘을 위해 기도한다는 나타샤 할머니. 우리는 그녀의 기도가 러시아의 흔들리는 오늘을 바로 잡아주기를 함께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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