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에 존재 인식과 역사의식의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온 원로시인 구상(요한ㆍ76) 선생이 63년 첫 창작 희곡「수치」를 비롯, 30여 년 동안 쓴 희곡과 시나리오를 모은 작품집「황진이」를 펴냈다.
최근 작「땅 밑을 흐르는 강」(93년) 등 희곡 3편과「자유로의 터널」등 3편의 시나리오를 함께 묶은 이 책을 통해 작가는『「왜 사느냐?」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나의 삶을 통한 해답이 전부 들어 있다』며 「오늘서부터 영원을 사는 길」을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구상 시인이 희곡 창작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자유당 정권 말기인 63년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르면서부터이다. 옥 중에서 알베르트 까뮈 등 전후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무신론적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이론에 집중한 그는「실존」의 문제를 희곡의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느낀다.
그리고『인간 실존에 내재된 것은 불안이 아니라 수치심』이라는 자각과 함께 출옥하자마자 희곡「수치」를 발표한다. 지리산에 남아있던 여공비「진명」의 귀순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인간이 실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불안이 아니라 수치심」이라는 깨달음을 구체화하고 있다.
전 4막으로 구성된 희곡「황진이」에서 작가는 송도 기생 황진이를 철저한 봉건사회 안에서 형성된 자신의 운명을 실존적 삶으로 성취한 세계적인 여성으로 파악한다. 출생과 성장기에서 맛 본 모멸적 환경으로 인간의 계급적 신분에 대한 모순과 남자 중심의 사회 규범에 대한 부조리에 심각한 회의와 반감을 갖게 된 황진이는 오히려「자기의 인간 여건을 스스로 휘여잡고 자기의 삶을 자기가 살았다」는 것이 작가의 평가이다. 그래서 그는 황진이를 20세기의 사르트르, 보봐르보다 앞서 16세기에 스스로 택한 삶을 책임진 실존주의의 최고 모형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땅 밑을 흐르는 강」에서는 급진과 보수의 이념 사이에서 고민하는 지식인을 그리고 시나리오「단군」에서는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라는 과학적인 세계관을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한다.
『사물에 대한 독자적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문학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구상 시인의 시 세계는「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주제와 제재」를 담고 있다.
일제 말기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의 낭만정신이나 인간 정신이 일제에 의해 단절된 후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이 대표하는 자연에 대한 서정이나 서경, 정한의 표현이 주류였던 시기에 구상 시인은 역사의식과 존재의식의 시 세계를 다루었고 이는 그의 시를 특징 짓는 요소가 됐다.
영어와 불어로 번역된 시집「초사의 시」, 독어판「드레퓌스의 벤취에서」등 다른 어느 한국 작가보다 많은 작품이 번역, 출간된 것도 바로 그의 존재론적 시 세계의 특징에 연유한다.
구상 시인의 작품에는 신앙이 항상 살아 숨 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속에는 불교와 노장사상의 흔적도 배어 있다.
작가 자신의 말대로 서구인들이 구상 시인의 시에 관심을 갖는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교적이면서도 동양적 사상이 함께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구상 시인은 작품집「황진이」를 발간하면서『시로써는 형상화할 수 없는 자신의 사물에 대한 본질적 인식이나 그 논리, 즉 사상을 구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희곡과 시나리오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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