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교회
로마를 중심으로 한 초기 서방교회의 사상을 로마학파라고 부른다. 로마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고 그들의 순교로써 증언된 교회라는 점에서 다른 교회들에 대한 우위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수위권을 행사하였다.
우리는 이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여러 교부 문헌들을 통해 살펴보았다. 로마교회는 신학사상 면에서는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하였지만, 로마의 주교들은 동방교회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중심이 된 신학적인 분쟁에 서간이나 간접적인 중재를 통해 관여함으로써 정통교리를 수호하였다. 3세기를 전후하여 로마교회에 히뽈리뚜스와 노바씨아누스가 나타나 신학적으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동방교회는 안티오키아 총주교좌와 알렉산드리아 총주교좌가 각기 해당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모두 희랍어를 통용어로 사용하였던 반면, 서방교회는 유일한 로마 총주교좌의 영향 아래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으며, 초기에는 희랍어를 통용어로 사용하다가 3세기 중엽부터는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방교회를 라틴교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라틴어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라틴신학이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용어상의 개념을 구별해야 할 점은, 라틴교회란 표현은 라틴어를 사용한 교회들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로마교회, 칼타고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교회(지금의 서북아프리카) 그리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교회 등이 포함되며, 지리적으로 서방에 해당되기 때문에 「라틴교회」는 「서방교회」라는 말과 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서방교회는 로마교회를 총주교좌로 하여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로마교회」라는 표현은 서방교회 전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로마교회라고 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로마교회만을 지칭한다. 로마교회에서 사용하던 통용어가 희랍어에서 라틴어로 이전되는 과정을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 150년 이전까지의 시기에는 로마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동방출신이었기 때문에 희랍어를 사용하였으며, 로마출신의 일반 신자들도 희랍어를 이해하였었다. 150년 이후부터는, 일반 신자들이 희랍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라틴어만 이해하였기 때문에 희랍어로 되어 있던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도되었지만, 교회의 신학문헌들은 여전히 희랍어로 저술되고 있었다. 그 후 250년경부터는 라틴어가 로마교회의 공용어로 완전히 정착되어 본격적인 라틴이 저서들이 나오게 되었다.
히뿔리뚜스의 생애
히뿔리뚜스는 170~175년 사이에 출생하였으며, 그의 출생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사료들을 미루어 볼 때 로마 또는 라틴계 출신이라기보다는 동방계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오리게네스가 212년경에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로마의 명성있는 사제인 그의 강론을 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로마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오리게네스와 필적할 수 있을 만큼 방대한 저서들을 남겼으며, 로마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가로 손꼽힌다. 포씨우스에 의하면, 유실된 한 작품 속에서 히뽈리뚜스가 스스로 이레네우스의 제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히뿔리뚜스의 가장 큰 오점은 가교황(假敎皇:An-tipapa) 문제이다. 로마주교 선출에 있어 경쟁자였던 깔리스투스(217~222년 재직)가 주교로 선출되자 히뿔리뚜스는 깔리스투스 주교의 신학 노선과 사목방향을 비판하면서 그에게 반기를 들고 나섰다. 깔리스투스 주교가 중죄인들에 대한 보속과 벌을 완화하자 그는 엄격주의로 돌아섰으며, 깔리스투스를 사벨리우스의 제자로서 성부수난설 이단에 물든 위험한 사람이라고 단죄하고 나섰다.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따로 교회를 세웠고 그들에 의해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어 이른바 역사상 최초의 「가교황」이 되었다. 로마교회의 이러한 분열은 깔리스투스의 후계자인 우르바누스(223~230년 재직)주교와 뽄씨아누스(230~235년 재직) 주교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히뽈리뚜스와 뽄씨아누스 주교는 둘 다 체포되어 샤르데냐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며, 이들은 그곳에서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쯕 뽄씨아누스 주교는 235년 9월28일 로마 주교직을 사임하여 후계자를 뽑도록 하였으며, 히뿔리뚜스 역시 자신의 가교황 직책을 포기하고 로마를 떠나기 전후해서 로마교회에 귀의하였다. 이로써 로마의 유일한 새 주교로 안테루스(235~236년 재직)가 선출되었다. 얼마 후 히뿔리뚜스와 뽄씨아누스 모두「죽음의 섬」이리고 불리우던 샤르데냐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비아누스(236~250년 재직) 주교는 두 사람의 유해를 로마로 모셔와 성대하게 장사를 지냈다.
뽄씨아누스 주교는 성 깔리스뚜스 성당에, 그리고 히뽈리뚜스는 띠불띠나 도로변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두 사람의 장례식이 236년 8월13일에 거행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이 두 성인의 축일을 8월13일에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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