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살펴본 갈리아주의의 영향이 18세기 중엽에 독일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교황권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us)로 나타났는데, 이 사상은 벨기에의 루뱅대학에 유학하여 공부할 때 당시 유행하던 갈리아주의(Galli-canismus)에 물들었던 독일 트리어(Trier)의 보좌주교 흔트하임(Johnn Nikolas von Hontheim, 1701~1790)에 의해 전파되었다.
흔트하임은 갈리아주의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한 루뱅대학의 교회법 교수인 에스펜(Zeger Bernard von Es-pen, 1646~1728)의 제자로서 그의 영향을 그대로 흡수하였다.
그는 유스티누스 페브로니우스(Justinus Febronius)라는 가명으로 발간한 「교회의 상태와 로마 교황의 합법적인 권한에 대한 책」(1763)에서 교회를 국가 권력에 예속시키려는 국교회 사상과 교황의 수위권을 공의회의 결의에 예속시키려는 공의회 수위설을 그대로 반복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신앙 안에서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고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또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졌다는 천국 열쇠의 권한은 신도들에게 주어졌고 신도단이 이 권한을 교황과 주교들에게 맡겼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의 위치도 주교들 가운데 제1인자일 뿐이며 주교들의 권위는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교황의 수위권은 명예적인 권위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교황이 선포한 법과 여러 가지 규범에 대한 결정들은 전 세계 교회와 각 국가 교회 그리고 교구의 승인이 있어야만 의무적인 법적 효력을 갖는다면서 교황은 공의회의 권위와 결의에 예속되며 신앙문제의 결정권도 없고 전체 교회만이 틀릴 수 없는 무류성을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열쇠」의 권한이 신도단에게 직접 주어졌다는 주장과 주교들의 권한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수여되었다는 내용은 모순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사상은 성직자 임명과 고위 성직자 선출 심사와 같은 문제에서 독일 교회가 프랑스나 스페인보다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쾰른, 트리어, 마인츠, 찰스부르크 교구 등 독일의 여러 지역에 빠르게 보급되어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려 하였다.
끌레멘스 13세 교황(1758~1769)은 1764년 흔트하임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아의 황제인 요셉 2세(재위 1741~1790)와 토스카나의 레오폴드 2세 등의 평신도 통치자들은 이 이론을 지지하였다. 이 페브로니우스주의가 갈리아주의와 다른 점은 갈리아주의가 교황권을 축소하여 그 권한을 국가에 넘겨주려 하였음에 반하여 페브로니우스주의는 축소한 권한을 주교에게 넘기고자 하였다.
페브로니우스주의의 악영향은 오스트리아에도 빨리 번졌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데레사 여황제(1740~1780)는 개인적으로는 열심한 신자였으나, 갈리아주의와 페브로니우스주의 사상에 기울어진 대신들에 좌우되어 교회의 자율권을 제한하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그의 아들이며 계몽주의자인 요셉 2세는 연방교회에 대한 그의 절대주의적인 국가권력 제도를 이용하여 독재적인 개혁을 실시하고 이제까지 인정되어온 교회의 재치권을 그의 권력에 예속시켰다.
그는 로마 교황청과의 직접적인 통신과 왕래를 금지하고 교회의 회칙은 물론 주교의 교서도 정부의 승인없이는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혼인성사에 관한 교회법의 내용도 일부를 마음대로 바꾸고, 교육과 자선사업에 종사하지 않는 관상수도원 등 전체 수도원의 1/3에 해당하는 6백여 개의 수도원을 폐쇄하여 세속 건물로 불하하는 등 교회 재산을 대부분 몰수하여 소위「종교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또 교구 경계를 정부의 행정구역과 일치시키고 교구 신학교를 폐쇄하여 전국 신학교를 두어 요셉주의에 충성하는 자만이 강의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그리고 종교의식, 미사의 횟수, 심지어는 전례 때 켜는 양초에 관한 규칙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간섭하여 그를「제의실의 황제」로까지 불렀다.
페브로니우스주의나 요셉주의의 사상적 기원은 갈리아주의에서 비롯되었고 이 갈리아주의는 왕의 절대주의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데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황청의 중앙 집권화가 유럽 여러 국가의 왕권 절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교황의 수위권과 시대적 상황적 필요에 의해서 제도화된 교황청의 중앙집권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되겠다.
교황의 수위권은 성서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인정된「거룩한 권위」이고 중앙집권화는 이 권위를 행사하는 데 필요한 인간적인 조직이며 제도라고 볼 수 있다.
페르로니우스주의나 요셉주의는 황제의 권위와 권력을 절대화하여 교황의 권위와 권리를 속권에 예속시키려는 정치적인 야심이 중요한 동기였다. 그러나 교황권의 강화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교회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고 거룩한 전통을 계승하는 데 필요한 제도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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