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슬픈 사람에게는 세상이 슬프게 보이고 기쁜 사람에게는 세상이 또 기쁘게 보입니다. 어린이들을 보면 그런 현상이 더 실감납니다. 탄광촌에서 사는 어린이들은 사람들을 모두 새까맣게 그립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린이들은 사람 옆에 으레 배와 바다를 그립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집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불렀던 노래는 슬프고 애절하며 한이 많은 곡들이었습니다. 문학도 예술도 다 그 시대의 모습을 반영해 줍니다.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에집트를 탈출한 뒤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고 약속의 땅에 정착한 뒤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열강의 세력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멸망한 뒤로는 유배생활에서 엄청난 고난을 뼈 저리게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들이 바라봤던 하느님은 고난 받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백성 자신이 고난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의 상도 역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이사 53, 10~11)에서는 아이야서의「야훼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종은 웬일인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반역죄로 몰려서 죄없이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게 도대체 뭐냐?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것은 실로 개죽음입니다. 그리고 그게 또 운명이라면 전생에 죄가 많았거나 팔자가 사나운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짖궂게도 사정없이 때리고 찌르는 아픔과 슬픔으로 표현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애정이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의 세상으로 위협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봐도 그렇고 순교자들이나 성인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다 뜻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다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 뜻이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답답하고 창피한 현실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내고 난 뒤에 돌아보면 그때 하느님의 뜻이 비로소 보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이 조금 늦게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황금이 불 속에서 단련되듯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때리고 찔러서 아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아픔은 또 감수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게 둘째 자리와 셋째 자리를 염치 좋게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별 수고도 없이 영광과 명예의 자리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높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그 형제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봉사하는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잠을 적게 자고 또 적게 놀면서 공부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참다운 은혜를 얻고자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처럼 밑으로 내려가서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난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국민학교 1학년 짜리가 자기 만한 동생을 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딱해서 지나가던 사람이『너보다 큰 애기를 업고 있으니 무겁겠다』고 한 마디 하자 그 1학년 짜리가 아주 의젓하게 대답하더랍니다.『하나도 안 무거워요. 얘는 제 동생이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그 십자가가 아무리 크다 해도 무겁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 불평과 비난이 많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비난과 욕설이 나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속에 미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사제 연수회에서 본당의 신자들을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본당 신부가 밑으로 내려가서 좀 죽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얘깁니다. 위에서 소리만 크게 치고 있으면 신자들이 다 숨습니다. 제 자신이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니까 신자들은 할 일이 없었고 또 그들이 하고 싶어도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꼴찌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상해도 크게 상하게 되는 아픔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 보통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고난과 또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영광의 상을 주시려 하십니다. 따라서 고난의 잔을 용기 있게 마시도록 합시다. 그것이 은혜의 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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