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설교의 대목에서『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해설한바 있다 (대목57참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 원문을 직역한다면 「영 (靈) 의 관점에서 가난한」, 또는「영을 존중하여 가난한」으로 번역해야겠지만 대부분의 라틴어역이나 영역에서는 이것을「영안에서 가난한」 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을 우리말에서는「마음으로 가난한」으로 번역하였는데 우리네 말에서는 실질적으로 가난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여유를 가지는 부자여야 도에 달한 사람이다. 그러니「마음으로 가난한」은 말이 좀 어색하더라도「영적으로 가난한」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영적으로 가난한」사람은 어떤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까. 예수의 말씀은 이사야서를 염두에 두고 구세사 속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 『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사61, 1: 루가 4, 18~19).
그러니 복된 가난한 자는 물질적 뿐 아니라 마음 고통 받는 모든「불쌍한」사람들이며,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결과적으로「마음으로 가난한」사람은「성령을 받아 가난한」사람들을 가리킨다.
오늘 대목에서「성령 안에서 가난한」사람의 생활하는 정신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신다. 그 정신은 먹고 입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하여 먹고 입고하되 그 삶 자체도 살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삶의 뜻을 하느님의 섭리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일종의 그리스도적 도사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친근한 제자들이며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대로「나의 사랑하는 양떼」들만이 이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 이것을 복음적 충언이라 하고 이 가난의 정신을 복음적 가난이라고 부른다.
이 삶의 지혜를 전한 것은 마태오와 루가가 거의 같은 말로 전하고 있는데 마태오는 이 대목을 산상 설교 속에 편집하였고 루가는 세속에서 사는 제자들이 물질생활에 대한 태도를 교훈으로 주는 대목에 편집했다.
두 복음서에서 제시된 예수의 교훈은 결국『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태 6, 21:루가 12, 34). 그러니 썩어 없어질 세상 재물을 싸놓고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천상보화를 써놓고 거기에 마음을 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교훈을 제자들에게 내리며「걱정하다」「조바심을 하다」「마음 쓰다」「안절부절 못 하다」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바와 같이 걱정, 조바심, 마음씀, 불안 따위가 조금도 삶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 평범한 진리를 예수께서는 농사일에서, 자연이 돌아가는 현상에서, 집안 살림거리에서, 예를 들어 가며 일깨워 주고 세상의 살림을 영성화의 길로 인도하신다.
교훈의 말씀은 네 단계로 마디를 구성한다. 첫째마디는 목숨과 육신이 귀한 것이라면 목숨과 육신을 구할 생각을 해야지 먹고 입는데 더 정신을 파는 것은 어리석지 않느냐는 교훈이다. 그것은 마치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 제 순서인데도 마치 먹기 위하여 사는 역순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목숨이라고 번역한 원문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대목에서「영혼」이라고 번역한 말과 같은 것인데 그 비유에서도「목숨」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하여튼 여기「목숨」또는「영혼」이라고 한 말은 인간생명의 원천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제 일차적으로 마음을 써야 할 생존이다.
살아야 한다는 것, 살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삶이 중요하다 해서 삶의 방편이 되는 먹고 입을 것을 삶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인생관이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로 이 모순된 생각이다. 목숨이 쌀보다 더 중요하고 육신이 옷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다. 공중에 나는 새, 까마귀까지도 살기 위하여 먹는 자연의 대원칙을 따라 산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연 섭리이다.
인간의 생명은 새들의 생명에 비하면 하느님의 특별 배려로 창조되었고 축복받지 않았는가. 오늘날 인구문제와 식량문제, 그리고 일부 지방의 기아사태를 들어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생명말살의 방법으로 인구제한을 방법으로 부르짖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공존하는 방법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라. 인간생명은 하느님이 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마디는 많이 먹고 잘 입어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하는 교훈이다.
목숨을 한치라도 더 늘리려고 애쓴다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목숨은 사람의 손안의 있는 것이 아니고 속된 말로는 운명에 달려 있고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하느님 섭리에 달려있다.
셋째 마디는 옷치장에 관한 관심이 덧없다는 교훈이다. 사람들의 옷 입는 유행이 시기마다 변한다는 것은 자기 옷차림에 실증이 난다는 증거이다.
아름다운 들꽃은 언제 보아도 한결같다. 온갖 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 왕(역대하9, 13이하) 이 저 들꽃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었을까. 하느님이 온갖 정성을 들여 지어낸 인간육신을 내버려 두실 것인가 어떻게 입을까 걱정일랑 버리고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의 자연을 사용하는 궁리가 필요할 뿐이다. 하느님의 보살핌에 믿음을 가지자.
넷째 마디에서 예수는 또다시 인간의 일상적인 조바심의 대상이 되는 것 즉 먹고 마시는 일과 잘 입고 치장하는 일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르치신다. 굶고 헐벗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질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위해서만 사는 이교도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목숨과 육신을 다 잃게 된다.
여기서 복음사가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는 자식의 요청이 무엇인지 잘 알고 마련해 무엇인지 잘 알고 마련해 주신다고 하신다. 그러니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관은 하느님나라를 찾는 인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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