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묘지 분위기는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절하고 마련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얘기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군데 군데에는 돌아가신 분을 위하여 성가를 부르며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 또 전통 가락대로 연도를 바치는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하 대가족이 눈에 띄었습니다. 연만하신 분이 아마도 열 댓이나 됨직한 자손들을 앉혀놓고 여기 뭍힌 조상들에 대한 말씀을 경건한 어조로 들려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듣고 있는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보기 좋았습니다. 나는 그 가족의 모습에 매료되어 한참동안 넋 잃은 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세배 온 자손들이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덕담을 들을 때와 같은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러고보니 묘지에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손의 도리로써 자기가 해야할바를 부지런히 끝내는듯한 인상이 짙었습니다. 전에 와서 하던대로 먼저 마련해온 음식을 차려놓은 다음 술 한잔 따뤄바칩니다. 그리고 모두 앉든지 혹은 선 채로 연도나 돌아가신 분을 위한 기도를 간단히 바칩니다. 그 다음 가족들은 둘러앉아 차려놓은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마시는 것으로 해야 할 바를 끝냅니다. 그러면 쓰레기는 치우고 나머지 짐을 챙겨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묘지를 떠납니다. 아마도 무슨 약속을 지켜야하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왜 묘지에 왔으면 자기 할일만 치루고 떠날까…. 이 기회에 돌아가신 분이 내게 하고 싶은 말도 있을 텐데…. 오늘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듣지 않았다면 영영 듣지못할 수도 있을 텐데…. 돌아가신 분은 차려온 음식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해주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것이 더 소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 할아버지께 말했듯이『제발 소원입니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요』한것과 마찬가지로 간절하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 후손들아 너희는 나처럼 살지는 말아라. 내가 죽어보니 그게 아니더라. 먼저 맏아들아. 들으라. 너는 어떻게 너만 잘 났다고 생각하느냐? 함께 사는 세상에서 더불어 살 줄을 알아야 한다. 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은 너의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너만 알고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다가는 언제 그 능력을 거두어 가실지 모른다. 그때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너의 능력도 이욱과 나누어야 한다. 오만방자 하거나 안하무인으로 처신하지 말아야 한다. 묘지에 와서까지 남들은 모두 저아래서 내려 걸어 올라왔는데 너만은 차를 끌고 남의 눈총을 무시하면서 여기까지 올라 왔구나!』.
『둘째야, 너에게도 할 말이 있다. 내가 너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반드시 누군가 해야하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왜 가면을 써야만 하느냐? 가장 정직한 것처럼 하면서 꼭 그렇게 뒷거래를 해야만 하느냐? 나는 네가 유능한 정치가가 되는 것보다 훌륭한 인격자란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정치지각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줄서기에만 신경쓰는 너를 보면 옛날의 나를 보는 것같다. 나도 줄을 잘 서서 일제시대엔 친일파였고 행방 후에는 4ㆍ19까지 자유당에 몸담았으며, 3공화국 유신시대에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위원도 했고 잠간이나마 유정회 국회위원도 했다. 하지만 너는 나보다 보폭이 넓어서 그런지 어째 야당
여당을 왔다 갔다 하느냐? 또 정치가로서 자신의 일지를 세우느라 남의 눈에 피눈물 나는 일을 저지르지 말아라. 결국 나도 지금 내 눈에서 피 눈물이 난다』.
『셋째에게 말한다. 너는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많이 힘써야겠다. 부부관계가 그런 것이 아니야. 너의 아내를 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무시하지 말아라. 가정이 건전해야만사가 잘 이루어진다. 맘 속에 간직한 이혼하고 싶은 생각을 로멘스를 살려 어디 여행이라도 한번 같이 다녀오는 것이 어떠냐? 아내의 부족하고 불만스러웠던 점이 이쁘게 보일 수도 있단다. 이녀석아, 낚시꾼도 지금까지 밀밥주고 공들인 것이 아까와서 자리를 옮기고 싶어도 쉽게 다른 자리로 못 가는 법이여! 이혼하고 재혼해봤자 지금보다 더 행복할거란 보장이 없을 뿐 아니라 경력이 생겨서 이제는 보다 쉽게 또 이혼할 것이다』.
『너희 3형제 모두 들으라. 너희는 아직도 내가 죽을 때의 재산 문제로 마음에 앙금이 다 가시지 않고있으니 제발 이제는 다 털어버려라. 나는 너희가 차라리 추석에 내 묘지를 찾지 않는 이리 있더라도 너희 형제간에 서로 우애있고 화복하기를 더바란다. 형제간에 그럴진데 어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할 수 있겠느냐? 내가 죽어보니, 서로 사랑한 것 만이 천당에까지 가지고 온 내 유일한 재산인 것을…』
노인 한 분이 석양을 등지고 묘지를 향해 벌써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벌써 세계십니다.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은지, 과거를 회상하며 아름다웠던 추억을 나누시는지, 아니면 자식들로부터 받은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 못할 가슴아픈 사연과 서러움을 할멈에게 일러 바치는지…보는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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