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람표식으로 나열해 보면 먼저 산상교훈에서「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5장3:루가 6장20)로 시작된다. 그리고 복된 가난한 사람을 영성적으로 이해시키기 시작하는 말로 다음과 같은 예수 혈육강생의 사명을 전하는 말씀이 있다 :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시고 나에게 기름을 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명하셨다」(루가 4장18). 가난한 자가 행복한 것은 성령의 영도하심으로 복음을 전해 듣고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의 일생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는 늘 가난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실 때 가난한 부모 말구유에서 나셨고 성령의 인도로 전교를 시작할 때 40일동안 광야에서 굶주린 모습을 보여 주셨고 설교 말씀중에서도「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루가 9장58:마태8장20)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의 가난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굶주리는 가난뱅이는 아닌듯, 유아시절 부모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집트 피난길에서 돌아 올 때 구약성서에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나자렛이란 잊혀진 촌구석에서 비천한 목수 생활을 했지만 그래도「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로 날로 풍부해 지고 하느님의 은총속에 자랐다」(루가2장40). 그러니까 예수의 생애를 보더라도 그분은「이 세상살이를 어떻게 하면 잘 살고 풍요롭게 살까」하는데 마음 쓰지 않고「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할까」에만 마음을 기울이면서 행복한 가난의 표본을 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벌서 누차 말한 대로 재물이나 부(富)자체를 나쁘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고 성 그리소스토모가 해석한 대로 재물의 노예가 되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단죄하셨던 것이다(P.Gㆍ57, C.295이하). 이러한 뜻에서 유산분배에 관여를 요청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할 일이 아니라며 거절하시고 세속의 탐욕에 빠져 들지 말라고 경고하셨고(루가12장13~15) 이어서 한 부자의 향락적인 궁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비유로써 말씀하셨다 (루가12장16~20). 이 비유의 결론은 하루 밤도 못가는 이기주의적인 풍요로운 재산과 하느님께 대한 텅빈 마음이 대조된다(루가12장21). 예수님이 하늘의 새들을 더 배불리 먹이러 오시지 않았고 들에 핀 꽃을 더 아름답게 하려고 오시지 않았으며 솔로몬왕의 영화를 사람들에게 주려고 오시지 않았어도 하느님은 그들을 보살피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세의 뜻이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니 하물며 구세의 뜻이 담긴 인간들이 먹고 입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면 말이 되겠는가(루가12장22~31:마태6장25~34).
더군다나 재물에 대한 탐욕에 짓눌려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풍요롭지 못하고 그야말로 진짜 가난뱅이, 다시 말해서 불행한 가난뱅이가 재물탐욕에 찌들어 있는 사람의 마음은 금은보석의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에 걸린다. 하늘나라의 문이 좁다(마태7장14)는 것은 이런 뜻이고「부자가 천국에 들어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나가는 것 보다도 어렵다」(마태19장16~23:마르 10장 17~25:루가18장18~25)는 말씀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세속적인 일반 욕망으로 확대하여「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탐욕 따위는 우상숭배나 다름없습니다」(골로3장5)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니 문제는 욕망을 섬기느냐 하느님을 섬기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여러분은 두 주인을 섬길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수는 없습니다」(루가 16장13:마태6장24)그러니 재물을 따르면서 동시에 예수를 쫓아다닐 수는 없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말씀을 듣고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휩쓸리면 그 욕심이 말씀을 덮어버려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숨막히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마태13장 22:루가 8장 14:마르4장18~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만 한다(루가14장33). 이렇듯 복음적 청빈이라고 하는「마음으로 가난한 자」는 내일 걱정으로 조바심하지 않고 유유작작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며 하느님이 뜻하시는 정의를 찾는데만 애를 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노상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표가 아니다. 예수를 친근하게 따르던 사람들중에 상류사회에 속해있던 사람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의회의원 아리마태아의 오셉(마르15장43) 유대아인들의 지도자였던 니꼬데모(요한 3장1이하), 베타니아 친구들 즉 라자로와 그의 자매 마르타와 마리아(요한11장1~44), 자기 재산을 바쳐 예수와 그리일행을 도우며 따라 다니던 성 부녀자들 즉 막달라의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 그밖의 다른 여자들(루가8장2~3), 제관 즈가리아의 부인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루가1장5이하),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갔던 거룩한 부인들, 이들은 말하자면 착한 부자들이었다.
이제 복음적 청빈, 「마음으로 가난함」은 자기 것을 남과 함께 나누는 자비와 같음을 알 수 있다.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과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과의 나눔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명백해졌다. 우리의 보화가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희사와 원조로써 하늘에 우리의 보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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