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면도할 때 칼을 즐겨 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매일 아침 세수하면서 이왕 얼굴에 칠한 비누 위를 칼로 밀어주면 되기 때문에 간단하고 시간도 절약됩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면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면도후의 상쾌함은 기계 면도로는 느낄 수 없는 느낌 입니다.
전기면도기라면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군에서 제대를 한 후 신학교에 복학을 했을 때니까 대략 25년 전쯤이라 생각됩니다. 그때는 전기면도기가 귀한 시기였습니다. 하루는 내가 늦잠을 자서 면도를 못하고 하루를 지냈더니 그렇잖아도 지저분한 얼굴이 덥수룩해서 보기가 영 흉했던 모양입니다. 독일 신부님 한분이 내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면도기 없어요?』 『예』 『나에게 두개 있습니다.』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혹시 한 개 주려나…」 그 다음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달라고 할 때까지, 내가 겸손 되이 청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습니다.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나는 면도칼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마 독일 사람은 털이 많아서 두개가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쏘아붙이고는 내방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못 가진 자의 마지막 자존심인가 합니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다면 솔직히 말해서 화가 덜 났을 것입니다. 평소에 나도 전기면도기를 하나 가졌으면 했기 때문에 「면도기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이미 「오늘 한개 생길까보다」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자존심은 있어서 거지처럼 얻기는 싫고 자기가 필요 없다며 하나를 불하하면 감사하게 받을 맘의 준비를 순식간에 끝낸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후회되는 대목이 여기였습니다. 왜 내가 『예』라고 했던가 『예, 하지만 필요 없습니다』 했어야 했습니다. 은근히 공짜를 기대했던 내 자신이 면도 안한 내 얼굴보다 추하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그 신부님께로 원망이 돌아갔습니다. 부자인 독일신부가 가난한 한국 학생에게 자기가 쓰지 않는 면도기 하나 주면서 생색을 내려는 눈치가 내게는 그렇게 뭇 마땅하게 여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왕 하나를 줄 마음을 먹었으면 서로 기분 좋게 건 낼 일이지 내가 고개 숙여 두 손 내 밀기를 기다리다니 참 치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한꺼번에 두개로 면도하지도 않는 것을…. 주는 사람은 목 고개를 치켜세우면서 주고받는 사람에게는 머리 숙여 받기를 강요한다는 것이 역겨웠습니다. 『차라리 안 받고 말지!』
다음은 선배들에게 원망이 돌아갔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러는 것은 선배들이 길을 잘못 들여서 그렇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옛날부터 자존심 따위는 쓰레기통에 쳐 넣어버리고 그저 무엇 하나 얻으면 좋아하고 감사하고 자랑하고, 그래서 이 사람들도 그렇게 습관이 들고 그런 일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못 가진 자에게 나누는 것을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주는 사람은 줄 수 있는 것 자체를 즐겨야지 받는 사람에 대한 우월감을 즐기려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려가며 자신의 우월감을 지키려고 주면서 생색을 내는 사람은 비겁하고 치사한 사람이란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자는 행동으로는 가진 것을 나누면서 속으로는 받는 자의 것을 뺏고 있습니다.
나는 적어도 치사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생색내려 하는 눈치에는 대단히 예민합니다. 함께 돈을 내서 성당을 짓는 일에는 돈이 없다며 조금 밖에 안내는 사람이 추가로 값비싼 제대나 감실 그리고 성모상 같은 것을 혼자서 봉헌하겠노라고 선뜻 나섭니다. 내가 군종신부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전방 군인들을 위문하러 온 어떤 본당신자들이 마련해온 위문품을 전달하면서 행동거지가 방만하고 어찌나 우쭐대던지 다시는 그런 위문단을 불러오지 않겠다고 혼자 결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추석 같은 명절에 불우이웃을 도우려 할 때에도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역효과가 나기 쉽습니다. 어떤 재벌회사가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각 일간지와 방송국에 나누어 낸 것을 보고 내 입맛은 달갑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재물을 가진 자가 재물을 못 가진 자와 나누듯 마음이 평화로운 자는 마음이 불안하고 갈등하는 자와의 진정한 나눔도 당연할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 해서 찾아오는 사람을 성의 있게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옛날에 내가 관공서에 갔을 때를 생각하니 생색만은 내려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생색을 내고 싶은지?」 오늘 복음 성경대로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도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 10)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자기 낯만을 내려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드리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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