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론의 주제는『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설교하고 계실 때 전부터 잘 알고 가끔 밥도 얻어 잡숫기도 했던 마르따와 마리아라는 자매의 전갈을 받는다.『우리 오빠가 앓아누워 죽을 지경이니 제발 좀 와서 병을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기억하셨지만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시다가 베타니아로 가신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을 즉시, 지체 없이 주셨다. 어떤 백부장이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께『우리 집까지 오실 필요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곧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신앙을 보시고 즉시 그 자리에서 리모콘(?)으로 그의 아들을 고쳐 주시기까지 하셨다. 예수님은 초면인 사람들에게 까지도 그들의 신앙을 보시고 원을 들어주셨다.
그런데 오늘은 참 이상하다. 왜냐하면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오히려 안 들어 주시고 이틀간이나 지체하신 후 마르타의 집 근처인 베타니아라는 곳으로 가신다. 왜 그러실까? 첫째 이유는 아마도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더 많이, 하루라도 더 만나서 면담도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서 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분은 몰려드는 군중의 요청을 하나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또 다른 이유는 저녁때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그만 두시고 틀림없이 기도하셨을 것이다. 마르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예루살렘에서 5리 밖에 안 떨어진 곳인데 수고 수난과 죽으러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께 확신을 얻으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주된 관심거리는 라자로를 살리는게 아니다. 수난과 죽음이 걸린 예루살렘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라자로의 병을 고쳐 주는 것 보다는 죽음에서 살려주는 것이 교육상 더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라자로의 무덤 앞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도 뜨게 해 줬는데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는 없는가 하고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예수님은 돌을 치우게 하시고는『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큰소리로 외치신다. 결국 라자로는 부활한다. 예수님게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내용이 복음서에 세 번 나오는데 한번은 나임의 과부의 외아들을 상여메고 갈 때 살리신 것, 또 한번 은 야이로의 딸, 열두 살짜리를 살리신 것, 그리고 오늘의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경우는 죽은 줄 알고 안치시켜 놨던 것이 깨어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종종 그런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라자로는 그렇지 않다. 마르타는 벌써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 분명히 말했다. 예수님은 썩어가는 시체를 온전히 다시 살리신 것이다. 어쨌든 라자로는 다시 살아났다. 그것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죽음에 대해 강조하려 하지 않으셨다면 라자로를 병자 상태에서 치유해 주셨을 것이다. 부활을 위해서는 죽음이 필수적이다.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은 당신이 곧 받으셔야 할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예고와도 같다. 「나도 저런 과정을 거쳐 부활한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이 아니다.
라자로가 죽어서 썩었기 때문에 다시 살리셨던 것처럼 완전히 죽어 썩어 없어져야 부활이 있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에만 집착한다면 부활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되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겉으로는 번지르르 하지만 속으로는 빈껍데기의 사람들이 있다. 좋은 집, 좋은 옷을 입고 살지만 그 안에는 건전한 얼이 사라져 버린 속빈 강정같은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인정도, 우정도 변질되었고 도의도 땅에 떨어져 짓밟힌지 오래라면 그런 사회는 무덤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지만 무덤은 조용하다. 공동묘지에 가면 으시시한 고요함만이 흐를 뿐이다. 아무도 외치는 자 없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신다.『라자로야, 나오너라!』 이 소리는 죽음을 이기고 나오라는 외침이다. 비록 혼자 외치시지만 엄청난 효과를 낸다. 라자로야! 이기심을 버리고 나에게 오라. 라자로야! 과소비라는 무덤에서 깨어 나오너라! 판공 때이니 냉담풀고 김 베드로야! 나오너라 아무개야! 장관 노릇할 자격이 없으니 깨끗이 손 털고 나오너라…. 큰 소리로 외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본당 신부의 강론을 통해 들어야겠다.『썩은 냄새 풍기지 말고 이제 그만 라자로야 나오너라』하시는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다. 지난 주일엔 태생소경이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튀어 나왔듯이 이번에는 어두움보다 더한 무덤에서 튀어 나오도록 노력하자. 2천년 전의 예수님은 복음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큰 소리로 외치신다.『라자로야, 나오너라!』 이렇게 될 때 베로 묶여 있던 손발과 수건으로 감겨있던 얼굴을 「풀어 줄 수」있을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