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적 감성의 작가 한수산(요한 크리소스토모ㆍ48)씨가 지난해 6월부터 PC통신 하이텔「문학관」에 연재했던「먼 그날 같은 오늘」이 책으로 엮어졌다.
한씨는 이 책에서 5공 초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 하에 하찮은 몇 마디 글로 인해 겪어야 했던 어이없는 수난과 이를 감당하지 못한 데서 오는 10여 년간의 악몽, 그리고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평화를 발견하는 일련의 과정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린다.
이 책은 각각 하늘ㆍ땅과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밤기차」,「사막에서 쓴 편지」,「겨울 안개는 깊지 않다」등 세 편의 다른 이야기를 하나의 장편으로 묶었다. 특히「밤기차」는 그의 영혼에 새겨진 깊은 상처와 그 상처가 아물면서 그 위에 딱지가 앉고 새 살이 돋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잔잔하지만 가슴 깊숙이서 느끼는 감동을 던져준다.
『고통을 못이겨 짐승처럼 울부짖어야 하는 것은, 아픔은 잊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 행위를 가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앞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나 사랑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건가. 나에게는 불가능했다』
81년 5월 중앙일보에 연재됐던 소설「욕망의 거리」중 한 부분이 문제시돼 작가는 물론 모두 7명에 이르는 언론인, 출판인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형용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88년 9월 그는 고문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4년 뒤인 92년 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먼 그날…」을 통해 10여 년을 걸쳐온 영혼의 상처와 평화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목욕을 해야겠구나. 그렇게도 멀었던 길, 한 발짝을 떼어놓기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길, 그 안으로 들어선단다』
자칭「가톨릭 삼수생」이라는 그는 일본 체류 중이었던 89년 9월 중국 방문 중 백두산 천지의 물 가장자리에서 세례를 받는 날 아침, 인간성에 대한 잃어버린 신뢰, 그 전에 그가 갖고 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예감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가야 했지만…이제 나는 다 잊고 있었다. 더 미워할 무엇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하지만 저자는 머리말에서『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저는 잊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한다.
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4월의 끝」이 당선되면서 등단한 한씨는 77년「부초」로「오늘의 작가상」, 91년「타인의 얼굴」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도시적 감수성을 지닌 섬세한 문체로 70, 80년대 최고의 인기작가로 불렸던 그는「밤의 찬가」,「해빙기의 아침」,「안개 시정거리」,「성이여 계절이여」,「욕망의 거리」,「가을꽃 겨울나무」등 지금까지 5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고 92년「진흙과 갈대」이후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작품의 폭을 넓히고 있다.
이제 사람들 앞에 상처를 드러낼 만큼 정신과 삶의 여유를 찾은 그는 앞으로 10년 안에 발표할 몇 가지 대작들을 심중에 두고 있다. 그 하나가 한국 가톨릭교회 순교성인들의 신앙과 정신을 소설화하는 것이다.
『「원죄의식」이 정신 안에 뿌리내려있지 않은 동양인이 어떻게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받아들이고 순교에 이르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아직 교회사나 가톨리시즘에 문외한이라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우선은 공부하는 자세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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