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접하고 있는「날으는 새도 날아 넘기 힘들고 구름도 쉬어간다」는 문경새재를 넘어 충북 괴산군 남동쪽 끝에 연풍면이 나온다.
연풍은 전체가 소백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어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하여 13년 간의 각고 끝에 사제서품을 받고 1849~61년까지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을 사목한 최양업 신부의 전교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연풍과 문경새재는 1801년 입교한 김병숙(1755~1815)이 연풍 교우촌으로 이주해 살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박해를 피해온 내포지방의 교우들이 정착, 1801년 전후 이미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성 황석두(루가)와 성 이윤일(요한)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 연풍 출신 순교자로는 청주에서 순교한 추순옥 전교회장, 홍주 감옥에서 순교한 간 그레고리오, 충주에서 순교한 김 마르띠노와 마태오 부자, 공주에서 순교한 조 아우구스띠노 등이 있다.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던 1976년, 제1차 연풍성지 순교자 현양대회 개최 당시만 해도 가축의 도살장으로 사용되던 연풍성지 내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서 있는 자리는 박해시대의 치명터로써 하루도 피가 마르지 않는 피비린내 나는 순교의 터전이었으며 병인박해 때 여기서 김 요셉과 전 바오로 등을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이 형구돌로 처형됐다.
지방 동헌의 6방 관속이 업무를 보던 향청(지금의 경찰서 격)을 1963년 12월 미화 1천 달러로 구입하면서부터 서서히 시작된 연풍성지 조성작업은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로 기묘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다.
박해 당시 향청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연풍성지 내에 자리한 연풍공소 건물과 부지 매입은 1백3위 한국 순교 성인을 현양하려는 하느님의 오묘한 뜻이 담겨져 있다.
현재의 연풍공소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모습을 달리해 왔는데 일제시대에는 헌병 보조사령부와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인 주재소로 사용되다가 해방과 더불어 경찰 지서로 사용됐었다.
3백 년 정도 된 이 공소 건물은 지방 관공서에서 관리가 어려워지자 일반에게 매각됐는데 때마침 공소 부지를 물색하고 있던 연풍공소를 본당 관할하에 사목하던 메리놀회 정안빈 신부(미국인ㆍ현 연풍성지 지도)가 고국의 후원금으로 3백90여 평의 공소를 매입하게 됐다.
매입 당시만 해도 연풍공소가 순교자의 얼이 배여 있는 곳으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매입 후 논과 집터 정리작업 도중 박해 때 죄인을 죽이는 형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2개씩이나 발견되는 등 점차 순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임을 알게 됐으며 1968년 10월 6일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나 성지 개발이 점차 가시화됐다.
연풍공소는 20여 년 전부터 공소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는 봉원윤(프란치스코ㆍ56세) 회장 내외의 물심양면의 헌신적 봉사로 점차 순교의 피와 얼이 서려 있는 순교 성지로 탈바꿈하게 됐다.
지역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봉 회장 내외는 성지의 부지 매입 등 성역화 작업을 위해 무보수로 헌신봉사 성지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1982년 8월 25일 천묘식을 거행, 연풍성지에 안장된 황석두 성인의 유해 발굴은 1979년 봉 회장이 부산의 오륜대 순교 기념관 방문 때「잘만 하면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찾아 연풍성지에 모셔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에서부터 시작됐다.
사비를 들여 평해 황씨의 족보를 이 잡듯이 뒤진 봉 회장과 연풍공소를 관할하고 있는 수안보본당 측은 황석두 성인이 족보에 없음을 알고 좌절하기도 했으나 2차로 족보를 검정하면서 후손이 없어 족보에서 황석두 성인이 누락되었음을 발견하게 됐다.
이후 평해 황씨 문중을 수소문, 황석두 성인의 가까운 후손을 찾아나선 이들은 평해 황씨 문중 산에 묻힌 천주교인의 무덤을 찾게 됐다.
당시 황석두 성인의 가까운 후손들은 그 무덤이 대역죄를 지어 집안에 누를 끼친 조상 혹은 천주교를 믿다가 돌아가신 조상의 묘로 구전으로 알고 있었는데 1980년 7월 9일 묘소를 발굴한 결과 황석두 성인의 묘임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황석두 성인의 유해는 교구장의 검증과 자료 검토작업 등을 거쳐 82년 8월 25일 연풍성지에 안장됐다.
매년 3~4만 명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연풍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로 신부 등 5인의 성인 상과 함께 순교 현양비가 건립돼 있다.
또한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제관을 비롯한 기념관 건립이 진행 중에 있다.
달레의 한국 교회사에 의하면 깔레(강)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전대를 흘려 포졸들이 돈을 줍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는 연풍성지. 쫓기고 굶주리는 박해의 와중에도 신앙을 위해 피난길을 나선 순교 선열들의 혼이 새재의 구름처럼 머물러 있는 연풍성지는 하느님을 향한 진붉은 신앙 선조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성 황석두(루가) -「성교예규」등 번역 출판에 공헌 절제 금욕 위해 아내와 별거도
본관이 평해인 황석두 성인의 집안은 본래 경북 풍기에서 살다가 조부(황한굉) 때 충북 괴산군 연풍현 병방리(방곡리)로 이주해왔다. 황한굉은 슬하에 주헌 주보 주면 주긍 4형제를 두었으며, 주면은 석규 석기 석두 3형제와 딸 셋을 두었는데 황석두 성인은 이곳 병방리에서 1813년(순조13년)에 태어났다.
명망이 높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황석두 성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아버지의 뜻을 따라 20세 때 과거를 보러 가다가 주막에서 천주교신자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성리학에 회의를 느끼고 고향으로 되돌아와 천주교 교리책을 탐독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 황석두 성인은 가족들이 천주교를 믿기까지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벙어리 노릇을 하며 교리 서적을 탐독하는 등 수계생활을 하며 결국 부친과 가족들을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뛰어난 교리 지식과 덕행으로 신자들의 귀감이 된 황석두 성인은 1845년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입국하자 안 신부를 모시고 포교에 전력, 신학생으로 선발되기까지 했다.
일찍이 강씨 부인과 결혼했으나 페레올 주교로부터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으로 동정을 지켜온 황석두 성인은 사제로 서품되려 했으나 부인이 몸 담을 수녀원이 없다는 교황청의 반대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다블뤼(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 교회 서적 출판에 기여했던 황석두 성인은「천주교 성교공과」「천주교 성교예규」「신명초행」「영세대의」등 안 주교 명의로 간행된 대부분의 책들의 출판에 크게 공헌했다.
충남 예산 거더리에서 교리서 번역작업 중이던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의 심문에서 배교를 강요 받았으나 끝내 거부한 황석두 성인은 보령의 갈매못으로 압송되어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로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1866년 3월 30일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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