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스럽도록 싫은 사람 곁에서 한동안 떠나면 호전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 나도 떠나고 싶었습니다. 수속을 마치고 떠날 때가 가까와 오자 어쩐지 남편은 풀죽은 얼굴로 정말로 떠나느냐고 물었습니다.

역겹고 지겨운 그의 곁을 떠나가면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 일인가요? 미국 케네디 공항에 내리던 바로 그날 나는 깨달았습니다. 남편과의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 집을 떠났는데 이미 그 고통은 나 먼저 그곳에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맺혀진 사슬은 내가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게 마련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성장해서 그들의 도움으로 살면서 부부관계조차 순조롭지 못하고 그들의 짐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집을 떠나보고 비로서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옥신각신 할 때는 너무도 지쳐 비추어 보지 못했는데 자리를 뜨고 보니 객관적인 자리에서 나를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초췌하던 남편의 얼굴이 흐려지는 눈시울에 측은하게 떠올랐습니다. 병 들고 직장 잃은 가장의 아픈 마음이 가슴 저미며 다가 왔습니다. 일에 파묻혀 종일토록 자리를 비운 허전한 방에 뎅그라니 남아서 지내던 그의 외롭던 날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습니다.

감정을 속이지 못해 마음대로 내뱉은 말로 인해 아내의 따사로운 위로의 정도 없이 고달픈 인생의 항로를 노저어 가던 남편이 애타게 찾고 부르던 첫사랑의 여인은 바로 희망과 위로를 안겨주는 피안의 등대였습니다.

나는 서서히 정죄하는 율법의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질서인 용서와 사랑의 빛속으로 옮겨져 가고 있었습니다.

5년동안 익혀온 바느질 솜씨로 그곳의 봉제 공장에 들어 갔습니다. 아침 8시에서 밤 8시까지 땀 흘리며 일했습니다. 한국에서 들어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창문도 없는 불빛 아래 틀소리에 파묻혀 일했습니다.

물론 좀 벌어 돌아가서 이제까지 못한 정성으로 다시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습니다. 밤중에 전화벨이 울리더니 서울집의 딸에게서 아버지가 다른 여인과 사귀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미국엘 가라고 성화같이 말하던 뒤안에 그런 꿍꿍이가 있었구나 싶어 괘씸했습니다. 저 먹기는 싫고 남 주기도 싫다는 속담과 같이 내 마음은 담당하지 못하고 다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 일은 다시 그에 대한 증오를 몰고 오면서 겉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돌아가라 돌아가라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서있는 자리를 지키며 참고 살아야 너는 산다』고 속삭여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므적 거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뉴욕의 거리는 초저녁인데도 사람의 그림자가 별도 없었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차디찬 겨울 바람이 예리한 칼로 얼굴을 도려내는 듯 추운날 저녁이었습니다. 집들이 가득찬 도시의 한복판에서 나 혼자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서 있었습니다.

갑자기 눈앞이 허허벌판으로 변했습니다. 저 멀리 지평선의 붉은 빛이 서서히 어둠속에 묻이는데 남편이 웬 여인과 함께 손을 잡고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둠 깔린 허허벌판에 홀로 서서 나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웬 소리에 놀라 앞을 보니 버스가 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