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사람들은 참으로 꽃을 좋아한다. 수많은 꽃 가운데 러시아인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꽃으로는 단연 장미를 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긴 목의 장미는 그만큼 더 사랑을 받는다.
1미터는 족히 될 듯한 긴 목을 가진 장미꽃, 모스코비치들을 매혹시키는 그 장미꽃 한 송이를 품 속에 안기 위해 필요한 자금은 1만9천여 루블. 우리 돈으로 불경 8천여 원 정도를 투자해야만 한 송이 장미꽃을 구할 수가 있다. 그래도 장미꽃은 없어서 못파는, 모든 러시아인들의「애인」이다.
러시아와 장미, 어쩌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의 관계는 잘 보존된 러시아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살펴보아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비틀거리는 경제, 하루살이와도 같이 숨 가쁜 삶의 와중에서 보면 엄청난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보존,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의 오늘을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의 삶조차 보장 받지 못할 만큼 급박한 경제 상황은 이미 러시아인들로부터 미소마저 빼앗아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끼 밥은 굶을지언정 꽃을 사는 러시아의 정서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러시아의 문화유산 그 보존의 비결을 쉽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
◆8천 원 짜리 장미꽃
그만큼 러시아, 모스크바 곳곳에는 다양하고 놀라운 문화유산들이 흘러넘쳤다. 그 모스크바 전역에 널린 아름다운 문화 유적들과 대면하는 일은 참으로 즐겁고 또 신나는 일이었다. 일찍이『러시아인은 누구나 모스크바를 어머니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 톨스토이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중심으로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중심이라면 크렘린은 모스크바의 상징이라 할 수가 있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심장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크렘린은 러시아의 예술품과 역사적 보물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모스크바 최대의 관광지.
13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동안 그 모습이 갖추어진 크렘린에는 궁전, 교회, 박물관, 탑, 관청 등이 줄 지어 운집, 러시아의 다양한 건축양식과 함께 각종 예술품, 역사적 보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의 집합체로 꼽히고 있다.
우스펜스키, 아르항겔스키, 그리고 블리고베시첸스키 성당은 크렘린을 찾는 세계 각국의 신앙인들에게 바실리 성당과 더불어 첫번째 탄성을 안겨주는 명소다. 성모승천, 대천사, 성모영보성당 등으로 각각 불리는 이 성당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그리고 무신론이 지배하던 오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용케 살아남았고 이것이 우리를 더욱 감격시켰다.
◆건축양식 각양각색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던 크렘린의 중심부에서 나란히 자리 잡아 건재함을 과시한 이들 성당 가운데 우스펜스키(성모승천) 성당은 러시아 제국의 대표 성당으로 황제의 대관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루어지던 곳이라고 했다.
약 1천여 명의 화가가 그린 이콘으로 천정 벽을 장식한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이콘은 12세기 러시아 정교 총대주교였던 성 세르기예프와 13~14세기에 그려진「삼위일체」가 있다. 명화와 명품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우스펜스키 성당 남쪽 입구 문에는 검은 동판 위에 금으로 성서의 각 장면을 묘사, 관광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1개의 노란색 돔과 은빛의 작은 돔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르항겔스키(대천사) 성당은 역대 황제와 귀족들의 시체 안치소로 사용되던 성당이었다고. 군대의 수호자, 성 미카엘 대천사 기념 성당인 이곳의 최대 걸작은 러시아 최대 이콘 화가 안드레이 루불료프의 이콘,「대천사 미카엘」. 복원작업으로 깨끗한 모습을 갖추기는 했으나 이콘의 손상된 부분들이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블리고베시첸스키(성모영보) 성당은 황제와 그 가족의 개인 예배 성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요한 묵시록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가 자랑거리. 역시 안드레이 루불료프의 진품 이콘이 유명한 이 성당은 16세기 중엽에 화제로 소실되자 이반 대제가 복원한 바 있다.
그 자체로써 역사적 유물로 손색이 없는 이들 성당들이 크렘린 궁전 내 여타의 건축물들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해 주고 있는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비록 박해는 받았을지언정 종교의 유물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던 이들의 역사 문화의식, 그것은 가난과 불편이 곳곳에서 넘쳐흐르는 러시아의 오늘 속에서 풍요한 내일을 점 치게 해주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이콘 미복원 아쉬움
성 바실리 성당은 러시아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는 모스크바, 아니 러시아의 상징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미 TV라는 매체를 통해 친숙한 이 건물은 이른바 붉은 광장 남쪽 끝에서 우리를 사로잡았다. 높이 47미터를 자랑하는 탑을 중심으로 8개의 갖가지 색깔의 둥근 지붕이 불균형을 이루며 서 있는 성 바실리 성당은 그 불균형과 각기 다른 색의 돔이 오히려 조화를 이루는, 모스크바 최대의 볼거리임에 틀림없었다.
◆역사 문화의식 각별
이반 대제가 카잔의 칸을 항복시킨 기념으로 1560년에 건립한 이 성당은 아름다운 모습에 얽힌 슬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성당이 완성되자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간 이반 대제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설계자 두 사람의 눈을 뽑아버렸다는 것이다.
무질서와 불균형 속에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바실리 성당, 크렘린 궁전 내의 아름다운 성당들과 그 속의 이콘과 명화들. 값으로 따지기 힘든 이 값진 유물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래 오랜 박해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이 같은 러시아의 문화, 역사의식은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값이 폭락하는 루블화,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값이 오르는 생필품과의 전쟁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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