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아들의 생일 선물로 승용차를 사 준 아버지의 변명은 이러했습니다. 「사주기를 꺼렸지만, 아들이 애처롭게 공부하던 고등학생 때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면 사주기로 약속한 것인데 여태 미루다가 3학년이 돼서야 생일선물로 사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면허증부터 준비해 놓고 매일같이 졸랐을 것입니다. 아버지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눈도 의식해야 하고 학생신분의 아들에게 승용차를 사준다는 것이 어쩐지 석연찮아서 자꾸 미루다가 아무래도 약속한 사실 때문에라도 사주기도 한 것 같습니다.
부모가 아들에게 승용차를 사주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잘 아는 어떤 분이 새벽미사 가는 길에 전문학교 2학년 학생이 운전하던 승용차에 치어 돌아 가셨을 때 승용차를 사준 그 학생의 부모를 많이 원망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 학생은 밤새 친구들과 놀다가 새벽에 귀가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마 그 아버지도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들이 아무리 졸랐어도 사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가끔「내 기도는 도대체 효험이라곤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복음성경(루가18:1~8)을 읽어보면 분명히「끈질기게 청하면 들어 주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끈질기게 청하지 않아서 그런가?」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나 죽을 병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 적은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으니「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생사가 달린 문제가 아니라도 어떤 부부가 제발 이혼만은 안하게 해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고, 어떤 수녀가 수도생활만은 포기하지 않게 해 달래도 헛기도 였으며, 어떤 착한 학생이 신학교에 꼭 합격하게 해 달래도 안됐습니다.
이런 좋은 것도 안되면 무엇을 기도해야 들어주시겠습니까? 청원하는 기도는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 좀 부친다는 생각이 들 때 전능하신 분의 능력을 빌어 보자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절실할 때 한번쯤 들어주시면 하느님의 영광도 드러나고, 기도해준 사람도 빛이 나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욱 열심해지고 또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도 될텐데, 그러면 어렵잖게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이고 다시는 이 땅에 박해나 순교도 없고「주의기도」대로 아버지의 나라가 곧 이루어질텐데…. 도대체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수녀님이 자기 아버지가 중환이라며 기도해 달라는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내 기도가 효험 없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어떻게 쉽게 대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부가 기도하면 더 효험이 있을지 알고 기도 청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해 달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대체로 신부는 하느님과 직통전화라도 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도 신자들의 이런 기대에 조금이라도 부응하시면 좀 좋아?」더구나 그리스도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여러분에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사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어주실 것입니다』(루가11: 9~10). 『나는 예수께 이 약속을 지키기를 엄숙하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내 청을 들어주시지 않을 때마다 성경에 문서로 남긴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실례지만, 사기꾼쯤으로 여길 것입니다』
혹시나 약속 때문에 자동차를 사줬을 그 전문대학생의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그분도 자기 아들이 그런 끔찍한 사고를 낼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약속을 안 지킨 사기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동차를 사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래의 일을 아시는 분도 한분뿐이시고 따라서 올바로 판단하시는 분도 한 분뿐이십니다. 이제 보니 나한테 사기꾼 취급 받는 것쯤은 그분이 우습게 여길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런다고 사기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설령 사기꾼이 된다손 치더라도 사랑하는 자녀의 장래를 위하여는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발견합니다.
오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봤습니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 들어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그래서 하느님이 올바로 판단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역시 내 판단이 하느님과 다르고 그분 판단이 항상 옳으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인가 합니다.
그래도 성경의 어떤 부분은 보다 분명히 했어야 좋았습니다. 『청하시오, 하느님이 올바로 판단하셔서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아무튼 내가 좀 흥분했던 모양입니다. 사기꾼이라고 한 것은 취소하고 사과합니다. 보속으로 지금부터 오전동안 담배를 안 피우겠습니다. 『그래도 내 기도는 좀 더 잘 들어 주시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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