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교회의 토착문제
중국의 그리스도교는 벌써 당 태종 때 네스토리우스파의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전해졌는데 중국에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는 징기스칸이 아시아 전체를 정복하여 동서의 왕래가 자유로워진 13세기 때였다. 그러나 신앙의 뿌리가 약하여 왕조의 멸망과 함께 그리스도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세 번째 그리스도교와의 접촉은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선교시대를 맞이하여 예수회 회원들이 중국에 파견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중국 선교에서 큰 업적을 남긴 선교사는 예수회 회원인 마테오릿치(Matteo Ricci, 1552-1610)일 것이다. 마태오릿치를 비롯한 예수회 회원들은 적응주의적인 선교활동으로 현지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며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순수하게 보존하면서도 현지인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마태오릿치는 중국 고전에서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찾고 그들의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중국 고전과 문학을 연구 결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설명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그의 박식한 중국 고전 지식 덕분에 북경의 고관들 및 학자들과 폭 넓은 교제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선교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가능한 한 모두 이용하였다. 중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시계, 프리즘, 천문학, 악기, 지리학, 건축학, 기계, 그림 등을 그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쳐 중국인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선교활동의 결과로 마태오 릿치가 사망할 당시 중국의 지도층에서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2천 명이나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교 교리서이자 호교선인 천주실의는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 우리나라의 선교에도 아주 좋은 영향을 끼쳤다.
마태오 릿치 이후에도 역시 예수회 회원인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1592~1666)도 적응주의적인 선교활동을 펼쳐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증가하여 1664년에는 25만 명, 1700년에는 1백만 명의 신자로 증가하였다. 그는 천문 관측기를 만들고 서양 천문학 서적들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천문학, 기계학 분야의 공헌으로 그는 중국의 고위 관직인 흠천감(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중국에서의 예수회 회원들은 그리스도교의 직접적인 선교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현실적인 필요에 봉사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1630년대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회의 선교사들이 예수회의 적응주의적인 선교 방식을 지나친 것으로 주장하고 로마에 고소하면서 중국 의례 논쟁이 일어나 중국 선교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선교 초기에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회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에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별로 중요시 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회심을 불러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심에만 의탁하였다.
그들은 동양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고 단지「십자가의 신비」만을 강조하고 교회 규정을 문자 그대로 엄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복음의 순수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그들의 선의의 동기는 이해하지만, 유럽의 획일주의적인 선교를 고집하는 폐쇄성을 드러냈다. 또 여기에는 선교 보호권을 행사하려는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주의자들과 포교성성과의 갈등, 뒤늦게 진출한 프랑스 영국 네델란드의 패권주의,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벌이는 새로 창설된 예수회에 대한 경계심 등 외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인노첸시오 10세 교황(1644~1655) 은 1645년 적응주의를 금지하여 가장 중요한 중국 관습의 하나인 조상 제사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알렉산데르 7세 교황 (1655~1667) 은 이 금지를 완화하였다. 1659년 포교성성은『중국에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혹은 유럽의 다른 나라의 문명과 관습을 옮겨놓는 것보다 더 바로스러운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을 도입하지 말고 비도덕적인 것이 아닌 한 어떤 민족의 관습과 전통도 배척하지 않고 상처를 입히지 않는 신앙을 가져가도록』선교들에게 권유하였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12세 교황(1691~1700)과 끌레멘스 11세 교황(1700~1721)은 공자와 조상 숭배 등 중국 의례 사용을 다시 금지하였다. 1707년 교황 특사 투르논(Tournon)의 중국 파견과 황실에 대한 그의 불행한 거동은 마침내 강희제와의 결별을 초래케 하였다. 인노첸시오 13세 교황(1721~1724)이 1723년 적응주의를 다시 완화했지만, 1742년 베네딕도 14세 교황(1740~1758)이 모든 적응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금지령을 발표하므로써 중국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장기간의 박해가 시작되어 중국 교회의 회생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금지령은 우리나라 초기 교회의 선교에도 막대한 지장을 주어 장기간의 박해를 야기시켜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하였다. 비오 11세 교황(1922~1938)이 1939년에, 비오 12세 교황(1939~1958)이 1940년에 중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국 의례의 금지령을 철회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
596년 그레고리오 대교황(590~604)은 원시적 자연 민족의 사고방식을 존중하고 가능한 한 기존 관습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연결점을 찾도록 선교사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초자연적 계시라면 각 민족의 전통 안에서 인정된 선의의 모든 가르침과 관습은 하느님의 길로 인도하는 자연 계시가 아닐까?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은 어느 한정된 지역이나 민족의 문화적 골동품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느님께 인도하는 영원한 진리의 빛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