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일 아침 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어떤 신자 한 분이 내게 질문을 했습니다.『신부님, 영성체의 효력이 며칠 갑니까?』나는 이 질문을 받고 당황했지만 다행히 피부가 검어서 표나게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멍하게 쳐다보고 있으니까『물론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요?』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떨결에『그렇지요, 다 다르지요』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제 내가 무슨 말로라도 대답해야 할 위기에 몰렸습니다.
적당한 대답을 찾기 위하여 일단 시간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오늘 아침사의 첫째 독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도 어떨결에 생각이 안나는 모양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공격할 기회를 잡았습니다.『그러면 둘째 독서는 생각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또 고재를 갸우뚱 했습니다. 그 순간 내가 그분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오늘 복음 성경은 기억하시겠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아, 오늘 신부님이 바리사이파에 대한 강론을 했습니다』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아직은 오늘 미사 중에 영한 성체의 효력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내 나름대로 미사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미사는 아시다시피 말씀의 전례와 성찬식 이렇게 두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전례는 물론 기도하는 부분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주된 부분이며 성찬식은 기도와 축성 부분도 있지만 성찬식이니까 영성체가 주된 부분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배울 때,「하느님의 말씀이 강생하셔서 사람이 되셨다」고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또 영성체 할 때는 누구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요?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미사를 한번 하는 동안 두번 예수를 모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번은 하느님의 말씀을 귀로 들어서 마음에 모시고 또 한번은 성체를 입으로 먹어서 몸에 모시고…. 귀로 모신 예수와 입으로 모신 예수가 같은 예수 아닙니까? 그러니까 귀로 모신 예수 곧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한 입으로 모신 성체성사의 효력도 지속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잊고 사는 동안에는 영성체의 효력도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어떤 분은 미사가 끝남과 동시에 영성체의 효력도 끝날 것입니다』.
「어휴!」나는 더 이상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돌아서서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와 손에 흐른 땀을 닦았습니다.
오늘 복음성서에서는 바리사 이파적 태도의 또 한 가지 유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자기네만 옳다』(루까 18, 9)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독선자들이며 이들의 특정은 다른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므로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장황하게 하고 나왔기 때문에 의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나는 매일 미사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귀담아 듣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은 일주일에 한번 미사에 가서 과연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간직하여 돌아오는지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부지런히 성당을 드나들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기가 하고픈 말만 하고 나온다면 오늘 성경의 바리사이파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듣기는 했지만 즉시 잊어버린다면 또한 결과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자기가 하느님께 청한 것은 기억하면서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야 없겠지요.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깊이 간직할 때만이 하느님도 내가 드린 말씀을 기억해 주실 것이며 또 기억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성체의 효력을 질문한 그분도 미사중에 듣게된 독서들은 그냥 하나의 절차쯤으로 여겨 지나쳐버린 듯했습니다. 성경 말씀도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했고 다만 강론 내용의 한 부분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듣기를 거부하는 것이 바리사이파의 특징이라 하고 보니 내가 질문하신 분의 말을 더 이상 안들으려고 돌아서서 다른사람들과 인사한 행위도 나 자신 바리사이파적 자세가 아니었나 반성하게 됩니다.
헌데, 사실 나는 그 분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의 어려운 질문을 받을까봐 두려웠습니다. 이제 보니 오늘 새벽 미사중에 내가 영한성체의 효력도 아침 안개와 함께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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