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은 축복의 길이며 동시에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상반된 길이 신앙 안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큰 갈등이 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을 기대하는 자는 먼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며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또 꼴찌부터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드러나는 영광만을 기대했는데 그분이 먼저 죽어야 한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마음 속엔 현세적인 축복에 대한 기대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으로 올라가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가 생기면 신앙을 내던지고 하느님을 외면합니다. 신앙은 그래서 어리석게 보입니다.
오늘 1독서(지혜 2, 12ㆍ17~20)에서는 악인들이 선인들을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지혜서를 썼던 기원 전 2세기 경은 그리스 세상이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한 그리스인들이 봤을 땐 무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지혜는 일종의 웃음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교 문화권에서 많은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결국은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것이 지혜서를 쓰게 된 동기요 또한 사상이었습니다.
선인들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
이것은 세상 끝날 때까지 인류가 자신에게 던지는 외로운 질문입니다. 악한 이들이 고통을 받고 선한 이들은 당연히 평화와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왜 세상의 현실은 거꾸로 드러나고 있느냐. 도대체 이런 모순 속에서 믿음은 또 무슨 해답을 주느냐. 바로 그와 같은 질문이 예수님에게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선인의 대표적인 케이스였습니다. 그분은 생전에 좋은 일만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셨고 병자를 고쳐 주셨으며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참 삶의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댓가는 모욕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예수님은 바로「그것」으로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건지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치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어리석게 보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었습니다. 고통은 비록 마귀의 유혹에 빠진 인간의 죄에서 왔지만 그러나 인간을 죄에서 건질 수 있는 힘은 선인의 억울한 고통이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선인들의 고통이 세상을 구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자신을 치유시키며 역사를 전진시킬 수 있는 것은 선인들의 고통 때문입니다. 억울한 이들의 희생 때문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를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면 그는 보다 행복한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있는데 남자가 바람을 피워서 딴 살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셋이나 있는데 부인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언젠가 그녀 가정을 방문했을 때 부인이 그랬습니다. 남편 덕분에 예수님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자기는 남편에게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한 여자의 희생이 한 가정을 건지듯이 한 사람의 억울한 고통이 세상을 건질 수 있습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요 피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에는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진정 선한 사람들의 고통에 의해서 용서 받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해서 구원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 년 전 국회 청문회와 또한 문민정부 초기의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를 보면서 누가 과연 행복한 사람이냐 하는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하느님 앞에 떳떳한 사람, 비록 억울하게 당하긴 했어도 깨끗하고 의로왔던 사람이 결국 마지막 승리자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특히 선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억울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선인들이 비록 고통은 받아도 절대로 망하지는 않습니다. 악인들의 눈에는 선인들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선인들의 억울한 아픔을 바로 세상을 죄에서 건지고 멸망에서 구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참 모습을 고통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억울한 고통을 통해서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우리는 또다른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희생을 실천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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