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을을 일컬어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이라 했던가! 이 풍요로움을 맛보려고 황금빛 들녘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을 들판에 서면 한없이 평화롭고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 모든 결실이 다 내것인양 마음이 풍요로와 지고 높고 푸른 하늘과 맑고 신선한 바람이 있어 따가운 햇살은 오히려 상쾌함을 더해줍니다.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서면서부터 이미 마음은 그런 들녘 한가운데서 있는양 설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면서부터 차츰 낭패감이 들었습니다. 이미 상당부분은 추수를 마쳤고 남은 부분도 벼를 베어 논에 그냥 뉘어 놓은 곳이 많았습니다.
일에 묻혀서 잊고 사는 동안 시간은 흘러、내가 그 풍요를 만끽하러 들녘에 나오기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늦었구나! 한 주일만 일찍 나왔더라도 좋았을 텐데…」 마치 노인 한 분을 돌아가시기 전에 꼭 찾아 뵈어야지 생각하고 있던 차에 부고를 받았을 때처럼 서운하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추수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 있어서 약간 위로가 되었습니다. 적당히 한적한 곳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약간 높은 언덕에 올라 들판을 한 눈에 내려다 보았습니다. 비록 절반가량은 추수를 했지만 나머지 부분 만으로도 가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아 추수를 끝낸 빈 논으로 눈이 자꾸 갔습니다. 「저기도 익은 벼가 그냥 있었더라면 보기에 더 좋을텐데…」마음 한구석이 빈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킬것도 없는 논 가운데 드문드문 서있는 허수아비는 본 이의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익은 곡식을 보기에 좋다고 해서 그냥 들판에서 묵힐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본래 곡식을 심은 것은 거두기 위함이었고 또 그냥 두더라도 미구에 찬 바람이 불어 벼포기가 쓰러져 썩고 낱알이 떨어지고 나면 황량하기는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나의 이 빈 느낌과는 달리 곡식을 거둔 논 주인은 지금쯤 창고에 쌓인 알곡을 생각하면서 흐뭇해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 거두지 않은 부분이 풍요로운 결실의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이미 추수를 마친 부분이 풍요로운 결실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한달 전、17세의 나이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의의 교통사고 당하여 천당에 간 조카가 생각났습니다.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이 빈듯한 느낌이 남아있습니다.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친지나 친구들의 마음 속 빈곳은 더 오랜 세월을 지내야 채워지고 잊혀질 것입니다.
인간들의 이런 빈 느낌과는 달리 생명의 주인이신 분은 어떤 흐뭇함을 맛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를 눈감겨드리고 슬퍼할 자녀를、일생을 함께한 배우자를 잃고 외로워 할 부부들、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보내고 애통해 할 부모들、평소에 절친하게 지내던 친지를 떠나 보내고 섭섭해 할 모두들의 마음에 빈 자리와는 달리 하느님 나라에서는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풍성한 결실과 수확 앞에서 모두가 즐거워하는 성인들의 축제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모든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이 모든 분들이 항상 우리곁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이 채워진다면 좋으련만、어쩌면 익은 결실을 추수하지 않고 그냥 논에 둬서 나중에는 후한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역시 결실은 거두어야 하리란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인 것을、가끔 임종하는 이의 옆에 서서 아무것도 할수없이 지켜 보기만 해야하는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지를 느끼곤 합니다. 논 주인이 벼를 베어가는 순간에도 지금까지 낱알을 열심이 지키던 허수아비는 그냥 두팔을 벌린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황량한 들판에 그냥 버려둔 허수아비를 보는 마음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이것도 할수 없었던 뭇 인간들과 같은 처지라는 생각에 한없이 슬픈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제 새로운 안목을 찾아야겠습니다. 황금 물결을 이룬 들판에서 풍요를 찾지 말고 알곡을 거두어 가버린 황량한 벌판에서 알곡의 추수를 끝낸 주인을 생각하며 풍요를 짐작하는 안목입니다. 내 중심의 만족이 아니라 씨뿌리고 땀 흘려 가꾼 주인의 만족한 풍요를 주인과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들은 모두 누군가의 마음에 빈자리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주인의 입장에서 풍성한 결실을 얻었기에 인간적으로 슬픈 마음을 지닌 모두가 그분과 함께 기쁜 하루를 지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추수 주인과 더불어 알곡의 풍요를 축하하는 축체이기에 말입니다.
추수가 다 끝나고 차디찬 북풍에 대지가 얼어붙은 다음 그 들판을 다시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결실의 풍요를 누리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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