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징표를 분별하고 시기를 놓치지 말라는 종말론적인 훈시로써 하느님과의 재빠른 화해를 촉구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회개할것을 힘주어 말씀하시는 대목이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이 나라가 큰 재앙으로 치닫고 있으며 끝까지 하느님과 다투는 경우 결국 멸망을 면치못할것을 눈앞에 보고 계신다.
아마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내다보고 계셨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그들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멸망을 앞에 두고도 회개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있다.
옛날 예언자들이 나라의 흉흉한 일을 내다보고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쳤던 것과 같이 예수께서도 안타까운 경고를 하시는 것이다. 지엽적인 불행한 사건은 전체적인 불행을 예감해야 한다. 4복음서 중에서 루가만이 기사화한 두사건이 서두에 나온다. 몇몇 사람들이 예수께 갈릴래야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지금 계시는 곳은 유다지방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갈릴래아 사건은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인즉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래아인들을 그 당장에서 학살하여 제단에 그들의 피가 낭자했다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루가복음서 외에는 다른 아무 문서에도 전해지지 않은 사건이다. 빌라도의 다 알려진 포악성이나 갈릴래아인들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갈릴레아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 등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역사에 남길 자료도 되지않는 다반사의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이 사건소식을 듣고 꽤나 충격을 받은듯 제자들에게서 전해들은 루가는 이것을 세상에 알리고 있는 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의 값으로 받는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은 그러한 징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뜻도 섞여 있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명백하다. 그 불행한 사건이 그들의 죄때문이라면 같은 죄를 지은 같은 동네 다른 갈릴래아 사람들은 왜 무사했겠는가. 그 학살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른 동향인들보다 더 악해서 죽은 것은 아니다.
당신들도 기억하고 있듯이 전에 실로암 탑을 공사할 때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깔려죽지 않았는가.
그들이 같은 도시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해서 죽임을 당했겠는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죄의 생활에서 벗어나 구원의 손길을 붙잡는 회개의 마음가짐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징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정의의 하느님이 언젠가는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이러한 지엽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남의 죄를 탓하기보다는 자기 죄에 대한 참회의 기회로 삼고 회개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로 삼는 것이 현명하다.
참회와 회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떤 지역이나 국한된 부류의 사람들만이 아니고 예외없이 모든 사람이 필요하다. 성전에서 로마군인들에게 당한 학살이나 실로암탑의 붕괴사건의 언급으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도와 그 백성들이 멀지 않은 장래에 로마인들의 군화에 유린될 것을 예언했는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은 실제로 예수께서 돌아가신후 40년후 기원 70년에 멸망하였다. 예수께서는 만년에 그 멸망의 도시를 바라보시며 한탄하시기도 하셨다. (마태24,1~2:루가21,5~24).
그러나 회개의 시간여유는 아직도 주어져 있다.
회개의 시간여유가 주어진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루가는 열매맺지 못하는 쓸모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든다. 팔레스티나 특히 유다지방에는 어디에나 포도밭이 있다. 여기 포도밭이라 한것은 우리나라의 개념으로는 과수원이다. 여기에는 이 지방의 주 과수인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가 심어져 있다.
당시에는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듯 이 비유에서도 오늘의 비유에서도 과수원 주인과 소작인 또는 농장 관리인의 대화로 꾸며져 있다. 주인은 이 과수원에 심어 놓은 무화과에 관심이 더 있다. 말하자면 선택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 3년동안 추수때마다 무화과를 딸까해서 가보았지만 이 나무가 돌나무가 되어 버렸는지 도통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니 아까운 땅에 이 나무를 심어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이 나무를 베어버릴 의사를 표명한다.
관리인은 아직도 희망은 버리지 않고 주인에게 1년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한다. 때는 내년을 위하여 나무둘레에 북을 주고 거름을 주어 내년 결실을 기대하는 때이다. 그때 가서도 그 타령이면 주인님 마음대로 하시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전통적인 해석은 발주인은 하느님이고 밭과 과수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의 선민 유대아인들이다. 관리인은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3년은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 온 세 단계를 말하는데 첫 단계는 율법이전의 시대로서 창조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시대이고 둘때 단계는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믿음의 시대, 셋때 단계는 모세의 율법시대로서 예수 그리스도까지이며 마지막 여유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시대를 가리킨다고 한다.
또 다른 견해는 3년을 예수의 3년동안의 전교기간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하여튼 무화과 나무 이야기는 하나의 비유인만큼 이상의 해설은 독자가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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