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모두에게 버림받고 조롱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날은 시아버님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경기여고 졸업생명부를 보고 그녀를 찾아온 며느리를 『어떻게 네가 그토록 나에게 잔인한 일을 할수 있느냐?』면서 호되게 나무라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미국에서 다니러 왔던 큰 딸이 『엄마 왜 그렇게 사람이 유치해요』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번득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일에 대해서 화를 내고 문제를 확대시킬수록 피해는 나에게 돌아오며 수치는 더해갈것이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구애 받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곰곰이 지난 세월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남편에 이어 그녀에 대한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원수같은 여인으로 인하여 내 인생이 송두리째 침해당하고 수치를 당했다는 그때까지의 생각이 웬일인지 거꾸로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어둠속에 묻히어 볼수 없었던 나를 주님의 빛이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내 인생을 망친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녀로 하여금 가슴 아픈 세월을 보내게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책임을 전가하던 자기 정당화의 자리에서 물러나 용서와 사랑의 자리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내 탓이었구나」동감하며 수치스럽고 이롭던 아픔과, 통회가 범벅이 되어 눈물이 쏟아져 실컷 울었습니다.
남편과 애인이라는 크나큰 거침돌을 앞에다 놓고 내가 살려고 몸부림 치던 자리에서 물러나고 내가 죽고 부수어지기로 다짐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이제 까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던 어려운 현실의 문제를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 경우 순응하고 받아들이어 나를 부수고 죽이면서 살아가는 자기 탈피의 길입니다.
우리집 북쪽에는 꽤 넓은 야산이 있습니다. 새벽이면 멀리서 야호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막내 아들이 가끔 산에 가곤 했습니다. 실컷 울고난 밤 휘뿌옇게 날이 밝아 올때까지 나는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산에나 가볼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치 그 누구에겐가 등을 떠밀리듯 일어나 산으로 갔습니다.
산어귀에 접어드니 때마침 높게 자란 아카시아가 연누색 새싹들 틈으로 새하얀 꽃망울을 조롱조롱 매달고 하늘을 어루만지며 오월의 훈풍속에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산비탈에 내려서니 졸졸 흐르는 햇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들으며 고개길에 들어서니 나무와 풀들이 춤을 추듯 살아서 움직이며 나를 위해 축복의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습니다. 발걸음은 두둥실 구름을 탄듯 살아서 움직였습니다. 산등성에 올라가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진 좁은 길을 걸으며 내가 천국의 어느 모퉁이를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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